비평

허형만 시인의 시 '겨울 들판을 거닐며'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허형만 시인의 시 '겨울 들판을 거닐며'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2025.10.05
허형만 시인의 시 '겨울 들판을 거닐며'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 허형만 시인

겨울 들판을 거닐며

시인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들판을 거닐며

매운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며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이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 고만 모여 앉아

저 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것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허형만 시인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중앙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불타는 얼음』『그늘이라는 말』『영혼의 눈』 등 여러 권과 활판시선집 『그늘』, 중국어시집 『許炯萬詩賞析』, 일본어시집 『耳を葬る』. 평론집 『영랑 김윤식연구』『시와 역사인식』 등 다수. 영국 IBC 인명사전 등재(2001~2002).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월간문학동리상, 한성기문학상 등 수상.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역임. 국립목포대학교 인문대학장, 교육대학원장 역임. 현재 목포대학교 명예교수.

겨울 들판의 시학, 역사를 품은 인간의 온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형만 시인의 시 〈겨울 들판을 거닐며〉는 단순한 자연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의 겨울을 통과한 한 시인이,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진실을 다시 일으켜 세운 서사이다. 그에게 ‘겨울 들판’은 계절의 풍경이 아니라, 시대의 상징이다. 억압과 결핍, 침묵과 고통의 세월을 지나온 민중의 얼굴이며, 그 황량한 들녘 위에서 피어난 인간 회복의 노래다.

허형만 시인의 문학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자연을 통해 인간을 읽고, 인간을 통해 시대의 상처를 해석했다. 그리고 그 모든 해석을 따뜻한 시선으로 봉합해냈다.

첫머리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이라는 구절은, 단지 자연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역사를 향한 윤리적 고백이다. 일제강점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의 굴곡 속에서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이 땅의 민초들, 이름 없이 흙에 묻혀 살아온 사람들의 생애를 그는 외면하지 않았다. 허형만 시인의 시적 시선은 언제나 ‘가까이 다가서는’ 시선이었다. 멀찍이서 평가하거나 단정하지 않고, 직접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인간의 체온으로 세상을 읽었다. 그는 시를 쓰는 이라기보다, 삶을 함께 살아내는 증인이었다.

“매운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며 /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라는 대목은, 억압과 고통의 시대를 살아낸 그의 내면사와 겹쳐진다. 역사의 바람은 언제나 매웠다. 시인은 그 바람 속에서도 인간의 온기를 발견했다. 그 따뜻함은 단순한 감정의 온도가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믿음의 온도였다. 그는 절망의 시대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허형만 시인 문학의 품격이다. 그는 아픔을 미화하지 않았고, 분노를 고함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대신 ‘맞을 만치 맞으며’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따뜻함을 길어 올렸다. 이 수용의 태도야말로 한국 현대시가 잃어버린 윤리적 품격이다.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모여 앉아 / 저 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이미 ‘새로운 역사’를 예감하고 있다. 얼어붙은 겨울의 땅에서도 초록의 생명이 움트듯, 그는 민중의 삶에서도 부활의 가능성을 본다.

이것은 단순한 자연의 순환이 아니라 역사적 회생의 은유다. 허형만 시인의 시는 ‘봄의 약속’을 믿는 시다. 아무리 혹독한 시대라도, 인간의 양심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믿음이 그의 시를 절망 대신 희망의 언어로 남게 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이라는 구절은 노동과 생존의 현실을 상징한다. 그는 도시의 지식인이 아니라, 땅의 냄새를 아는 시인이다. 그 흙은 한국 근현대사 속 민중의 삶, 노동의 땀, 전쟁의 피, 그리고 시대의 눈물로 젖은 흙이다. 허형만 시인은 그 무게를 짊어지고 걸었다.

그는 그 무게를 원망하지 않는다. 외려 그것을 인간의 근원으로, 역사의 뿌리로 인정한다. 그의 시에는 ‘고통의 역사’가 있지만, ‘한(恨)의 문학’은 없다. 그는 슬픔을 신앙처럼 품고, 침묵으로 승화시켰다.

시의 마지막,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것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 대목은 인간에 대한 선언이자, 역사에 대한 선언이다. 그는 세상을 단정하지 않는다. 가난하다고, 늙었다고, 실패했다고, 다시 피어나지 못할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허형만 시인의 시는 인간을 향한 불신의 시대에 대한 항거이며, 역사를 향한 깊은 애도이자 화해다. 그의 ‘다가서기’는 곧 역사를 품는 행위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는 허형만 시인의 인간학과 역사철학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는 시 속에서 민초의 삶을 존중하고, 자연의 리듬 속에서 역사의 윤리를 읽는다. 이 시는 역사를 직설로 말하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 한 세기의 진실이 들어 있다. 바람 부는 들판을 걸으며 그는 우리 민족의 겨울을 건넜고, 그 끝에서 희망의 봄을 기다리는 들풀들을 보았다. 그 시선이 바로 허형만 시인의 시대 인식이며, 그의 문학이 끝내 따뜻한 이유다.

그는 겨울의 시인으로 불려도 좋다. 그의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 아니라 생명의 잠행기다.

허형만 시인의 시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저항의 시이며, 역사 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으려는 한 지식인의 기도이다.

그가 말한 겨울 들판은, 결국 이 땅의 사람들이다.

그 들판 위에서 시인은 여전히 말없이 걷고 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 인간을 믿으며, 역사를 품으며.

―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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