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바람, 시간 속으로 ― 두 겹의 생, 두 겹의 바람 시인 청민 박철언의 시세계를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억새 바람, 시간 속으로 ― 두 겹의 생, 두 겹의 바람 시인 청민 박철언의 시세계를 읽다 202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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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 바람, 시간 속으로
시인 청민 박철언
바람이 억새꽃 사이로 하얗게 부는 날
풍경 살랑이는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릴 적 친구들과 동산에 오르면
햇별처럼 재잘거리던 얼굴마다
함박웃음으로 내려앉던
하얀 억새들의 간지러운 합창
억새꽃 닮은 내 젊은 연가 한 곡
하얗게 부푼 마음 오직 그대를 향해
결코 부러지거나 뿌리 뽑히지 않던 청춘
심연까지 흔들며 애절하게 불러보던
어둡고 습했던 시절 사각 창살에 갇힌 죄수복
감금된 말, 억울한 정의가 시로 씨 뿌려져
동토를 뚫고 노란 민들레로 피어나
하얀 홀씨 되어 하늘로 자유롭게 흩날리던 봄
한 계절 깊숙이 익혔다가 화답시로 피어나
억새 바람으로 불어오는 걸까
온갖 풍상 겪은 바람이 된 나
또다시 은발의 억새 앞에 서니
굽이굽이 인생길 잘 지나왔다고
어깰 토닥이며 연거푸 하늘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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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 바람, 시간 속으로
― 두 겹의 생, 두 겹의 바람
시인 청민 박철언의 시세계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박철언 시인의 ‘억새 바람, 시간 속으로’는 삶의 두 층위를 한 폭의 시화처럼 펼쳐낸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억새밭에 이는 바람과 함께 어린 날의 추억을 노래하지만, 그 이면에는 질곡의 정치사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세월이 숨어 있다. 시의 구조는 이중적이다. 전반부는 동심과 청춘의 투명한 기억으로, 후반부는 시대의 폭력과 그 속에서 견뎌낸 인고의 세월로 이어진다. 시인은 억새의 이미지로 이 두 세계를 하나의 생명선처럼 잇는다.
첫 연에서 “바람이 억새꽃 사이로 하얗게 부는 날 / 풍경 살랑이는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구절은 순수한 회상의 세계를 연다. 하얗게 이는 억새는 동심의 상징이며, “햇별처럼 재잘거리던 얼굴마다”는 그 시절의 무구한 웃음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의 억새는 바람에 흔들리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의 어린 시절과 같은 존재 — 바람과 놀던 소년의 자유, 아직 세상의 무게를 모르는 투명한 영혼이다. 시의 전반부는 이처럼 동심과 순수의 영역에 머물며, ‘억새’가 순수한 생명력의 은유로 작동한다.
그러나 시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바람의 결은 달라진다. “어둡고 습했던 시절 사각 창살에 갇힌 죄수복 / 감금된 말, 억울한 정의가 시로 씨 뿌려져”라는 대목에서, 바람은 더 이상 들판을 스치는 자연의 바람이 아니라, 시대의 폭풍으로 변한다. 시인은 한평 남짓한 공간에서 囚衣를 입은 채, 억눌린 말들과 함께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 고통은 단순히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부정한 시대가 한 인간의 정의를 가두어버린 집단적 상처였다. 이때의 억새는 더 이상 하얀 유년의 꽃이 아니라, 시대의 상처를 온몸으로 견딘 인간의 형상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고통을 절망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동토를 뚫고 노란 민들레로 피어나 / 하얀 홀씨 되어 하늘로 자유롭게 흩날리던 봄”은 감금의 세월 속에서도 시를 통해 피어난 자유의 노래다. 억새는 여기서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시인의 영혼으로 변한다. 억눌림 속에서도 시는 피었고, 침묵 속에서도 정의는 언어가 되었다. 이로써 억새는 고통을 승화시킨 존재의 상징으로 완성된다.
마지막 연의 “은발의 억새 앞에 서니 / 굽이굽이 인생길 잘 지나왔다고 / 어깰 토닥이며 연거푸 하늘거린다”는 구절에서, 시인은 과거의 고통을 초월한 자의 평화로운 미소를 짓는다. 억새는 이제 그의 분신이며, 그 바람은 세월의 자비다. 앞부분의 바람이 순수의 노래였다면, 뒷부분의 바람은 인고의 찬미다. 이 두 바람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결국 한 줄기의 생명으로 이어져 있다. 그것이 바로 박철언 시세계의 핵심 구조이자, 그가 품은 이중의 미학이다.
그의 시는 억눌림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 정신의 기록이며, 동시에 한 시대의 상처를 품은 치유의 노래다. 동심에서 출발해 인고로 귀결되는 시의 노정은 한 인간이 시대의 풍랑 속에서도 시와 정의로 자신을 지켜낸 서사다.
결국 이 시는 한 생애의 진실을 이렇게 고백한다. 바람은 변해도 억새는 꺾이지 않는다. 흔들리되 부러지지 않는 그것이 곧 시인의 삶이고, 그의 시의 본질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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