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삶의 언어로 새긴 어머니의 사전 ― 박정민의 '엄마의 사전'을 읽고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삶의 언어로 새긴 어머니의 사전 ― 박정민의 '엄마의 사전'을 읽고 2025.10.20
삶의 언어로 새긴 어머니의 사전  ― 박정민의 '엄마의 사전'을 읽고

□ 박정민 시인

엄마의 사전

시인 박정민

울 엄마 소학교도 못 다녀

낫 놓고 ㄱ역자 모르는 까막눈

시골 아낙네, 흙과 살던 여인

산수를 넘어선 어느 날부터

ㄱ ㄴ ㄷ ㄹ, 가 갸 거 겨

영희야, 철수야 낱말도 척척

전화번호 밑에 이름 쓰시고

살림은 뒷전 도를 깨치시겠다는

아부지 덕분에 어머니는 강철이 되셨다

“밥 많이 묵어라, 괜찮다,

몸 성허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오뚝이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건강하면 뭐든 해 낼 수 있다고

엄마 따라쟁이가 돼가고 있다

불굴의 강인함 속에서

나누고 비움을 배우며 살아 간다

별다른 것 있는 줄 알았던 인생

살아보니 별것 아니더라

맘 편하고 몸 건강하게 사는 게 행복함을 알고 갑니다

이 아침 나즈막히 불러 봅니다

엄마, 엄마 들리시나요

삶의 언어로 새긴 어머니의 사전

― 박정민의 ‘엄마의 사전’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박정민 시인의 시 ‘엄마의 사전’은 가난하고 배움이 부족했던 한 시골 어머니의 삶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 강인함과 순수한 사랑의 본질을 노래한 작품이다.

시는 화려한 비유나 수사보다, 생활의 언어와 토속의 정서를 통해 진실의 무게를 전한다. 시인의 언어는 꾸밈이 없고, 전라도의 구수한 사투리처럼 정감과 삶의 냄새가 스며 있다. 이 작품은 한 세대의 어머니들이 겪은 현실을 넘어, 우리 모두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따뜻한 회고시다.

첫 연에서 시인은 “울 엄마 소학교도 못 다녀 / 낫 놓고 ㄱ역자 모르는 까막눈”이라 하여 어머니의 무지를 부끄러움이 아닌 사랑과 존경의 시선으로 그린다. 한글을 몰랐던 어머니는 ‘흙과 살던 여인’으로, 자연과 맞닿아 살아온 순수한 존재다.

단순히 무지한 여인이 아니라, 배움의 길에 늦게나마 도전한 강인한 인간으로 형상화된다. “산수를 넘어선 어느 날부터 ㄱ ㄴ ㄷ ㄹ, 가 갸 거 겨”라는 구절에는 세상과 자신을 새로 배우려는 어머니의 열정이 녹아 있다. 이 대목은 문맹의 어머니가 인간적 존엄을 되찾는 감동의 장면으로 읽힌다.

둘째 연에서는 ‘아부지 덕분에 도를 깨치시겠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남편의 권유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단순한 ‘배움의 대상자’를 넘어 ‘깨달음을 얻는 존재’로 거듭난다.

“어머니는 강철이 되셨다”는 표현은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생명력과 인내를 상징한다. 그 강철 같은 마음을 시인은 “밥 많이 묵어라, 괜찮다, 몸 성허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 속에 녹여낸다. 이 대사는 단순한 사투리가 아니라, 세대를 넘어 울려 퍼지는 인생의 지혜이자 한국 어머니의 상징적 어록이라 할 만하다.

셋째 연에서 시인은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 건강하면 뭐든 해 낼 수 있다고 / 엄마 따라쟁이가 돼가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삶의 철학을 이어받는 ‘존재의 계승’이다.

어머니의 강인함이 자식의 신념으로 전이되며, 그로써 인간의 삶이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진실이 드러난다. “불굴의 강인함 속에서 / 나누고 비움을 배우며 살아 간다”는 구절은, 물질의 풍요 속에서도 나눔과 비움의 미덕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현대적 메시지로 읽힌다.

마지막 연에서 시는 서정의 절정을 맞는다. “별다른 것 있는 줄 알았던 인생 / 살아보니 별것 아니더라”는 고백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어머니의 삶을 통해 배운 ‘소박한 행복’의 철학, 즉 “맘 편하고 몸 건강하게 사는 게 행복”이라는 통찰은 불교의 무소유 정신, 기독교의 평안, 도가의 무위와도 맞닿는다. 시인은 그 깨달음의 끝에서 “이 아침 나즈막히 불러 봅니다 / 엄마, 엄마 들리시나요”라며 끝맺는다. 이 호명은 시인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의 언어이며, 그리움의 절정이다.

박정민 시인의 시에는 늘 흙냄새가 난다. 도시의 언어가 아닌, 삶으로 다듬어진 생생한 말들이 한 줄 한 줄 숨을 쉰다. 그는 ‘문장으로 꾸미지 않고 마음으로 그리는 시인’이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의 어머니이며, 그가 부르는 ‘엄마’는 곧 인간 존재의 원형이다.

‘엄마의 사전’은 단순히 한 가정의 추억담이 아니라, 시대와 세대를 넘어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찬가다. 글을 모르는 까막눈 어머니가 세상과 자신을 새로 써 내려간 그 한글의 흔적은, 곧 ‘사랑의 사전’이 된다. 그 사전에는 화려한 말이 없다.

오직 ‘밥’, ‘괜찮다’, ‘건강’, ‘사랑’ 같은 단어들만이 빛난다. 박정민 시인은 그 단어들을 우리 가슴속에 다시 새겨 넣는다.

우리는 깨닫는다. 인생이란, 결국 어머니의 말 한마디처럼 단순하고, 그 단순함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철학임을.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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