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허의 지성, 눈물로 빛이 되다 ― 주광일 시인의 시 '잘 읽었습니다'를 읽고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겸허의 지성, 눈물로 빛이 되다 ― 주광일 시인의 시 '잘 읽었습니다'를 읽고 2025.10.23
□ 주광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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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시인 주광일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봤지요
님의 침묵은
님의 부재가
아님을
아 나는 어찌하여
이제까지
알지 못 했던가
여든살이 넘도록
부끄러움의 끝에
흘러내리는 눈물
절망의 계곡을 넘어서
신의 빛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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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허의 지성, 눈물로 빛이 되다
― 주광일 시인의 시 ‘잘 읽었습니다’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주광일 시인의 시 ‘잘 읽었습니다’는
청람 작가의 소설 《빛이 닿는 곳에서》를 읽고 답글을 시화詩化한 것이다.
주 시인은 오랜 세월 세속의 정점에 선 한 지성인이, 인간과 신, 지식과 겸허 사이의 깊은 간극을 스스로 성찰하며 도달한 영혼의 고백이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검사, 장관급 고충처리위원장, 교수, 미국 변호사로 이어지는 화려한 이력 속에서도 시인은 세상의 영예보다 인간됨의 본질을 더 귀하게 여긴다. 그는 권력과 지식의 언어가 아닌, 침묵과 눈물의 언어로 진실을 말할 줄 아는 드문 인격자다.
첫 구절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봤지요”는 단순한 정지의 순간이 아니라, 인간의 오만이 깨어지는 경건한 침묵의 장면이다. 그 허공은 공허가 아니라, 오히려 신의 기척이 감도는 자리다. 세속의 언어로 수많은 논리를 세워 온 시인이 이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서 있는 장면, 그곳에서 이미 깨달음은 시작된다.
“님의 침묵은 님의 부재가 아님을”이라는 구절은, 부재를 결핍으로 보지 않고 ‘존재의 또 다른 형식’으로 해석하는 사유의 전환을 보여준다. 그는 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신의 침묵 속에서 응답을 듣는다. 이는 지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차원, 곧 영혼의 청취력이다. 신은 말하지 않아도 존재하며, 그 부재의 시간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어둠을 본다. 주광일 시인은 그 침묵을 ‘신의 말 없는 계시’로 이해한다.
“아 나는 어찌하여 이제까지 알지 못 했던가 / 여든살이 넘도록”은 학문의 완성이 아니라 겸허의 완성에 다다른 한 인간의 고백이다. 시인은 세상의 으뜸 자리에 있었지만, 진리의 문은 언제나 낮은 곳에 있음을 깨닫는다. 여든이 넘어서야 비로소 ‘앎의 끝이 모름의 시작’임을 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성의 최고 형태다. 이 구절은 세속적 성공으로는 채울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결핍을 직면한 이의 참된 눈물이다.
“부끄러움의 끝에 흘러내리는 눈물 / 절망의 계곡을 넘어서 신의 빛을 찾아갑니다”에서 시인은 학자나 변호사가 아닌, 한 사람의 순수한 영혼으로 돌아온다. ‘부끄러움’은 죄의식이 아니라 성찰의 뿌리이며, ‘눈물’은 그 뿌리에서 피어난 깨달음의 꽃이다. 절망의 계곡은 인생의 심연을 뜻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신의 빛이 비춘다. 시인은 절망을 통해 희망을 배우고, 부끄러움 속에서 인간의 품격을 되찾는다.
이 시의 위대함은 지식의 정점에 선 인물이 문학의 순수 앞에 무릎 꿇는 겸허에 있다. 그는 “잘 읽었습니다”라는 평범한 말로 시작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당신의 글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읽었습니다’라는 고백이다. 이는 단순한 독서의 반응이 아니라 영혼의 변용이다. 청람의 소설이 인간 실존의 근원적 물음을 던졌다면, 주광일 시인은 그 물음에 삶 전체로 응답했다.
그의 시는 문학과 신앙, 철학이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태어난다. 학문이 아닌 사랑으로, 권위가 아닌 겸손으로 도달한 언어다. 겸허는 그를 더욱 고귀하게 만든다. 그는 세속의 권좌를 내려놓고, 마음의 옷깃을 여며 신 앞에 선다.
그가 “선생”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사회적 예우가 아니라, 진리 앞에 자신을 낮추는 영혼의 예법이다.
주광일 시인의 ‘잘 읽었습니다’는 인간의 최종 학위가 ‘겸손’임을 증명한 시다. 그가 걸어온 지성의 길이 이제는 한 편의 시로 응축되어, ‘배움의 끝은 경청이며, 앎의 완성은 사랑이다’라는 진리를 조용히 들려준다.
그의 눈물이 곧 빛이 되고, 그 빛이 다시 인간의 길을 밝힌다.
그는 학문으로 세상을 밝혔고, 시로써 영혼을 구원했다.
이 작품은 그 두 길의 합일이자, 한 인격이 완성된 순간의 찬란한 기록이다.
ㅡ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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