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지나온 길, 새로운 길》을 읽으며 ― 역사의 살얼음판을 건너온 한 밀사의 시적 고백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지나온 길, 새로운 길》을 읽으며 ― 역사의 살얼음판을 건너온 한 밀사의 시적 고백 2025.11.24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지나온 길, 새로운 길》을 읽으며 ― 역사의 살얼음판을 건너온 한 밀사의 시적 고백

지나온 길, 새로운길

시인 청민 박철언

푸른 직진도 많았지만

험난한 길가야만 했던, 나라 운명 걸린 길

우회로의 유연함과 편안함보다 신변위험 무릅쓴 채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수십 차례 비밀출장의 길

대북포용정책으로

평화통일의 초석다지려

북방정책의 기수로 공산권 문 열어 반쪽외교로부터 전방위 세계외교시대 열려고

냉기류 속을 처음 디딘 외로웠던 살얼음길

사명감 책임감을 온몸에 채웠어도 긴박감에 웅크린 숨이 몇 움큼씩

심장 뒤편으로 빠져나와

수십 년 지났건만 잠결에도 놀라 깨곤 하는가

억눌린 숨결 무게 얼마나 무거웠으면

이젠 푸른 맥박이 뛰는 직진

평온한 길만 걸어갔으면

문학의 숲에서

갇혀 있던 숨들

푸른 하늘로 풀어 보내고

맘껏 펀 시의 날개로

자유롭게 비상했으면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지나온 길, 새로운 길》을 읽으며

― 역사의 살얼음판을 건너온 한 밀사의 시적 고백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편의 시가 한 사람의 생을 압축할 때, 그것은 서정의 영역을 넘어 기록과 문헌의 자리에 선다. 박철언 시인의 ‘지나온 길, 새로운 길’은 바로 그러한 작품이다.

이 시는 개인적 감상이나 회상을 넘어,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비밀스러운 국면을 몸으로 통과한 한 역사적 증언자의 내면 기록이다.

특히 6공화국 시기, “6공의 황태자”라 불리며 외교·안보 최전선의 숨 막히는 실무를 이끌었던 그의 행로는 정치적 명암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한 인간의 고독한 투쟁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그 투쟁이 처음으로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비로소 빛을 허락받은 순간이다.

시의 첫 구절, “푸른 직진도 많았지만 험난한 길가야만 했던, 나라 운명 걸린 길”은 젊은 관료의 자신감이 아니라 국가적 사명 앞에서의 결연을 품고 있다. 이어지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수십 차례 비밀출장의 길”은 냉전기 외교 최전선의 실상을 단 한 줄에 응축한다.

촛불은 외교적 위험뿐 아니라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생명의 위기를 의미한다. 화려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역사적 격랑의 빙판 위를 맨몸으로 걸어야 했던 밀사의 나약한 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시가 가장 깊은 심층으로 내려가는 부분은 “잠결에도 놀라 깨곤 하는가 / 억눌린 숨결 무게 얼마나 무거웠으면”이다. 이 대목은 사건의 서술이 아니라 트라우마의 서술이다. 역사의 기록은 보통 성과 중심으로 남지만, 이 시는 그 과정 속 몸으로 흡입된 공포·고독·책임감의 잔여물, 다시 말해 ‘국가에 헌신한 자에게 남는 상흔’을 조명한다.

한 사람이 조국의 미래를 위해 감당한 공포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신경계를 깨워 잠에서 이글어 올린 고백은 읽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전반부가 과거의 시간 속에서 역사의 공기를 복원했다면, 후반부는 인간 박철언의 회복과 구원의 요청으로 전환된다.

“이젠 푸른 맥박이 뛰는 직진 / 평온한 길만 걸어갔으면”

이 구절에서 ‘푸른’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나라와 생명을 동시에 지켜낸 뒤 비로소 허용된 평화의 색이다. 이어지는 “문학의 숲에서 갇혀 있던 숨들 푸른 하늘로 풀어 보내고 / 맘껏 편 시의 날개로 자유롭게 비상했으면”은 문학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길임을 뜻한다. 외교·안보의 최전선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 위를 걸었던 사람이 이제 언어의 숲과 감정의 날개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것이다.

이 시의 서술 구조는 정치적 주장이나 자기 변호가 아니라, 역사의 비밀 공간을 지나온 한 인간이 늦게 도착한 자기폭로의 시간 앞에 선 모습에 가깝다.

지금까지 왜 침묵했는지 묻는다면, 그 이유는 시가 이미 답한다. 국가적 기밀과 한반도 정세라는 무게 앞에서, 그는 말할 수 없는 시간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그러나 냉전의 기류가 다시 고조되는 오늘, 이 시는 단순한 개인의 고백을 넘어 역사적 경고이자 평화의 메시지가 된다.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던 지난 시대의 노력이 평가절하될수록, 이 시의 증언적 가치는 더욱 커진다.

박철언 시인의 발언은 다시금 문학으로 돌아온다. 이 시는 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시의 언어로 말한다. 문학은 기록이면서 동시에 치유이고, 고백이면서 해방이다. 외교 실무자·장관·정치인으로서의 이름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숨과 심장이 이 시에서 되살아난다. 잊히거나 삭제된 인물로 살아가기보다, 역사가 던진 무지막지한 무게를 견뎌낸 존재로 기억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다. 비평적 시각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 엘리트가 자기 체험을 “문학의 장”으로 옮긴 드문 사례이며, 그 드러냄의 방식이 비난도 미화도 아닌 “숨결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청민 시 ‘지나온 길, 새로운 길’은

한 시대의 권력의 기억이 아니라,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저당 잡힌 한 밀사의 숨을 복원한 기록시이다.

또한 앞으로의 생을 문학으로 걷겠다는 선언이자,

역사가 분열과 대립으로 다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에 건네는

평화의 메시지이다.

한평생 봉인되어야 했던 과거가

비로소 언어를 얻은 날,

그것은 한 인간의 고백을 넘어

역사의 입이 열린 순간이다.

그 순간을 문학이 받아 적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오래 남는다.

역사에 남을 시이기 때문이다.

청민 시인께 드립니다

살얼음 같던 역사의 밤,

당신은 촛불 하나로 길을 열었습니다.

숨 한 호흡조차 허락되지 않던 그 시절,

조국의 심장을 품고 걷던 발걸음이

얼어붙은 바람 속에서 떨리던 것을

우리는 이제야 듣습니다.

위험을 아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길,

돌아서 갈 수 있었지만

돌아서지 않았던 그 다짐 속에

나라의 새벽이 움트고 있었습니다.

‘이제 말할 수 있다’는 결심 앞에서

당신의 시는 고백이 아니라

오랜 상처의 봉인을 풀어낸 인간의 용기입니다.

그 지난한 시간들을 문학의 날개 위에 올려

하늘로 건네는 오늘,

가려졌던 역사의 가장 깊은 숨이

비로소 빛을 가집니다.

평화의 이름으로 걸어온 그 길 위에

당신의 시가 다시 길을 엽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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