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박철언 시인의 '가을의 끝자락, 그 들판에 서서'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박철언 시인의 '가을의 끝자락, 그 들판에 서서' 2025.11.25
박철언 시인의 '가을의 끝자락, 그 들판에 서서'

가을의 끝자락, 그 들판에 서서

시인 청민 박철언

추수 마친 가을 끝자락

텅 빈 들판에 서 보았는가

바람 따라 벼 이삭 출렁대던 황금 들판 대신

소들의 겨울 먹이로 랩핑된 볏짚들

힘든 농사일로 가장 무거워진 계절 수확 끝내니 비로소 가벼워진 농부의 어깨

맑고 높은 늦가을 하늘

국화 쑥부쟁이 구절초의 환한 미소로 온통 밝게 빛나는들판

아직 매달려 반짝이는단풍도

바람 따라 구르는 낙엽도

천상도 지상도 눈부신 계절, 늦가을

훌훌 벗은 나무들, 물기 잃어가는 들플 점점 혈거워져 텅 빈 고요로 가는 들녘

가을빛 희미해지며 다가올

깊고 검은 어둠의 겨울

색깔이 바뀌는 계절 앞에

모두 함께 겸허해졌으면

지나온 삶이 알곡인가 쭉정이인가 잡초인가

영성 지닌 인간들이 성찰하고 고뇌하는 계절

영혼의 울림과 마음의 설렘, 가슴 떨림에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봄을 준비한다

동면에 빠져도 새 생명 품을 들판과 함께

가을의 끝자락, 그 들판에 서서

― 계절의 침묵 속에서 인간의 성찰을 이끈 시인의 눈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청민 박철언 시인은 시대의 전면에서 격렬한 역사의 흐름을 헤쳐 온 인물이다. 법조인으로, 정치가로, 국가의 운명을 건 결단의 장면들 한가운데서 그의 삶은 종종 폭풍의 前哨 와도 같았다. 황혼에 이르러 그는 삶의 가장 고요한 자리, 문학의 품 속에 자신을 내려놓았다. 바람을 막아내던 방패의 삶에서, 바람을 들여보내는 시인의 삶으로 넘어온 것이다.

‘가을의 끝자락, 그 들판에 서서’는 바로 그 내면의 변화와 성찰이 가장 투명한 시학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시의 첫머리에서 “추수 마친 가을 끝자락 / 텅 빈 들판에 서 보았는가”라는 질문형 구조는 독자를 단순한 대상으로 두지 않는다. 시인은 감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계절 앞에서 인간이 서야 할 태도를 묻는다. 수확의 끝은 곧 비움의 시작이며, 풍요의 절정이 끝나는 자리에서 어깨를 내려놓는 순간이 찾아온다.

“힘든 농사일로 가장 무거워진 계절 / 수확 끝내니 비로소 가벼워진 농부의 어깨”라는 구절은 단순한 농경 이미지가 아니다. 생을 걸고 책임을 짊어졌던 한 인간이 무게를 온전히 내려놓는 순간을 은유한다. 삶 앞에서 끝없이 긴장했던 어깨가 처음으로 가벼워지는 지점 — 이것이 문학을 향한 그의 늦은 귀향이다.

중반부의 묘사는 계절의 아름다움에 머무르지 않는다. 국화, 쑥부쟁이, 구절초, 단풍, 낙엽의 선명한 장면들 사이에 시인은 기어이 “빛”과 “소멸”이 공존하는 계절을 놓아둔다. “훌훌 벗은 나무들, 물기 잃어가는 들풀 / 점점 혈거워져 텅 빈 고요로 가는 들녘” — 이 표현은 아름다움의 쇠락이 아니라, 생의 겸허를 배우는 자연의 교본이다. 가을은 절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절정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계절이다. 시인은 나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비추고, 들풀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인다.

“지나온 삶이 알곡인가 쭉정이인가 잡초인가”라는 구절은 이 작품의 壓卷이다. 자기 비판이나 회한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후의 성찰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이때 시는 종교적 언어를 전면화하지 않으면서도 영성의 깊이를 품는다. 그것은 교리의 목소리가 아니라, 살아온 인생의 무게가 부르는 침묵이다. 영혼을 세우는 기도는 손을 모으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행위라는 사실을 시인은 일깨운다.

마지막 행은 이 작품의 존재론적 결론을 완성한다. “동면에 빠져도 새 생명 품을 들판과 함께.” 끝은 끝이 아니다. 소멸은 다음 생을 위한 품기이며, 겨울은 절망이 아니라 준비다. 시인은 계절을 노래하면서 인간의 운명을 말한다. 추위에 들어가는 삶을 두려워하기보다, 다시 피어나기 위해 품어야 할 침묵이 있음을 말한다.

청민 박철언 시인의 작품 세계는 결국 하나의 철학으로 귀결된다. 삶은 다투어 얻는 것이 아니라, 겸허히 내려놓아야 완성된다. 젊은 시절 그는 국가와 시대를 향해 자신의 삶을 던졌고, 황혼의 시절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 묵묵히 귀를 기울인다. 계절의 쇠락 속에서 인간의 어깨가 가벼워지는 순간, 삶의 진실이 비로소 열린다는 것을 이 시는 말한다.

‘가을의 끝자락, 그 들판에 서서’는 늦가을의 서정이 아니다. 황혼의 생이 배워낸 내려놓음의 미학, 겸허의 윤리, 다시 살아갈 준비의 침묵이다.

들판이 텅 비어야 생명이 시작되는 것처럼,

어깨를 내려놓는 순간에 인간은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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