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산처럼 묵묵히, 시처럼 정결하게 — 시인 이기순 선생님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산처럼 묵묵히, 시처럼 정결하게 — 시인 이기순 선생님 2025.11.27
산처럼 묵묵히, 시처럼 정결하게 — 시인 이기순 선생님

□ 낭산 이기순 시인

산처럼 묵묵히, 시처럼 정결하게

— 시인 이기순 선생님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사람의 생애를 말하려면, 그가 걸어온 시간보다 더 오래 서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히려 짧은 문장 하나로도 충분히 전해진다. ‘산을 사랑하고, 사람을 믿으며, 시로 세상을 쓰다듬은 사람’—이기순 시인을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늘 조용한 존경과 따뜻한 그리움 속에 남는다.

이기순 시인은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문학의 터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의 시정신의 뿌리에는 미당 서정주 선생의 직접적인 지도가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서정적 전통과 내면의 울림을 동시에 체득한 세대이다. 그러나 그는 스승을 모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처럼 자기만의 리듬과 침묵을 쌓아 올렸고, 시간의 비탈에 오래도록 자신만의 길을 낸 시인이었다.

나는 서울 오산고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며 이기순 선생을 가까이 모셨다. 그는 나의 선배 교사였고, 문학의 선배였으며, 삶의 스승이었다. 교무실의 어느 한 자리에 늘 조용히 앉아 계셨던 그분은 결코 소리 내어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삶으로 보여주었다. 후배 교사들에게는 기품 있는 선배였고, 제자들에게는 품 넓은 스승이었다. 눈앞의 성취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눈, 말보다 행동이 앞선 품성, 그것이 바로 이기순 선생의 ‘교육’이었다.

그의 문학은 다채롭다. 시인으로 시작하여 수필가, 칼럼니스트, 소설가로도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장르를 넘어선 그의 문장은 늘 ‘이기순답다’는 말을 듣는다. 담백하되 깊고, 따뜻하되 절제되어 있다. 그의 시를 읽고 나면 묵직한 여운이 남는다. 언어는 결코 소란스럽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생의 자세는 분명하고 단정하다.

그의 호는 ‘낭산(浪山)’이다. 바람처럼 산을 오르며 시를 묵상하던 그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는 진정 산의 사람이다. 산의 고요함, 산의 인내, 산의 품을 닮았다. 전국을 발로 누비며 쓴 기행문과 수필집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그것은 땅에 대한 경외이며, 자연에 대한 기도이다. 그는 독자에게 그 땅의 바람과 흙냄새, 고요한 숲의 울음을 전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내 나라, 내 땅’을 사랑하는 법을 일깨워 주었다.

문단에서도 그는 이미 원로로서 존경받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자리에도 앞서 나서지 않았다. 겸손은 그에게 있어 ‘선택된 미덕’이 아니라 ‘체화된 습관’이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이들은 말한다. “이기순 선생은 조용히, 그러나 깊이 다가오는 사람이다.” 시인이자 교사, 아버지이자 남편, 글을 쓰는 사람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품성을 지켜낸 이기순 선생의 생애는 그것만으로도 한 편의 아름다운 문학이다.

그의 최근 작품 ‘꽃길’을 읽으며 나는 다시금 그의 생을 떠올렸다. ‘하늘에 닿는 길, 바로 거기가 꽃길입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단순한 시의 끝맺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삶의 윤리이자 방향이며,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처럼 다가온다.

그는 늘 그랬다. 화려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걸었다. 산을 닮은 사람답게, 침묵으로 가장 깊은 사랑을 표현했고, 시로 가장 조용한 울림을 남겼다. 그가 걸어온 길은 곧 ‘꽃길’이었다. 그것은 누가 깔아준 길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단어 하나, 호흡 하나로 가꾼 길이다. 그 길을 걷는 동안 그가 심은 단어들은 오늘도 우리 마음속에서 피어나고 있다.

이기순 시인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의 글에서, 그의 산책로에서, 그의 제자들 마음속에서. 그리하여 나는 믿는다.

그가 남긴 문장 하나하나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고.

“당신은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이 삶을 걷고 있는가.”

□ 낭산 이기순 시인 ㅡ 태백산 정상에서

꽃길

시인 이기순

남은 세월이 십 년일까 이십 년일까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그 길은 숲 속으로 이어진 조븟한 오솔길이기를 언제나 나는 소망합니다. 나란히 손잡고 그간 가슴에 묻혀 있던 숱한 얘기들을 함께 나누며 갈 수 있다면 하늘 닿는 길 바로 거기가 꽃길입니다.

하늘에 닿는 마음의 꽃길

— 삶의 황혼을 걷는 서정의 풍경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기순 시인의 시 ‘꽃길’은 생의 여백에 놓인 침묵과 그 침묵을 함께 걷고자 하는 존재를 향한 지극한 염원을, 단아한 언어로 직조한 한 편의 서정적 기도문이다. 시인의 시선은 덧없는 시간을 바라보되 그 안에 꽃처럼 피어나는 ‘관계의 온기’를 중심에 세운다.

이 작품은 인생의 말미에서 발견하는 삶의 본질이 결국 ‘누구와, 어떻게 함께 걷느냐’에 있음을 잔잔히 웅변한다.

시의 첫 구절 “남은 세월이 십 년일까 이십 년일까”는 단순한 숫자의 셈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끝자락에서 묻는 존재의 근원적 물음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마지막 길목에서 건네는 조용한 독백이다.

여기서 ‘남은 세월’은 수명이라기보다 ‘함께하고픈 마음의 시간’으로 전환된다. 생은 언제나 앞이 아니라 곁을 향하고, 시인의 사유도 거기 머문다.

“숲 속으로 이어진 조븟한 오솔길”이라는 표현은 단어 하나하나에 체온이 묻어 있다. ‘조븟하다’는 토속의 말결 안에 담긴 시인의 정서는, 인생의 오랜 추위 끝에 도달하고픈 따뜻한 공간의 비유다.

이 오솔길은 세상의 소란을 피해 들어간 마음의 좁은 길목이자, 삶의 본질과 만나는 비의적 통로다. 오히려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기에 더욱 감응의 여지가 크다.

이어지는 구절 “나란히 손잡고 / 그간 가슴에 묻혀 있던 / 숱한 얘기들을 / 함께 나누며”는, 단순한 동행이 아닌 ‘기억의 동행’을 노래한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 잊힌 듯 남겨두었던 것들을 다시 꺼내어 나누고 싶은 마음. 말하자면 이는 삶이라는 긴 강을 건너온 두 사람이, 그 강의 물소리를 뒤늦게 마주하며 서로의 얼굴을 조용히 쓰다듬는 장면이다. ‘손을 잡는다’는 행위는 물리적 동반이 아니라 감정의 복원이며, 신뢰와 치유의 은유다.

마지막 행, “하늘 닿는 길 / 바로 거기가 꽃길입니다”는 이 시의 가장 고요하고 찬란한 진술이다. 하늘은 초월의 장소이자 영혼의 귀소처이며, 꽃길은 그 하늘로 향하는 내면의 길이다.

여기에 이기순 시인은 흔히 소비되는 ‘꽃길’이라는 언어를 되살려, 사랑과 회복, 동행과 나눔이 응축된 인생의 마지막 풍경으로 재해석한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과장 없이 절제된 언어로 말의 결을 조율하며,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감정을 품어내는 방식으로 독자의 가슴에 여운을 남긴다. 시적 장치는 단순하되 내재된 상징은 복층적이며, 자연과 관계를 통과해 도달하는 인생의 미학을 서정의 숨결로 전달한다.

특히 ‘조븟한’이라는 시어는 방언의 감각을 통해 시의 온도와 결을 풍성하게 해주는 결정적 장치로 기능한다.

결국, 이 시는 ‘함께 걷는 사람’이 곧 ‘꽃길의 조건’임을 말한다. 꽃이 피어 있기 때문에 꽃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온기를 나누는 존재가 있어 길이 꽃처럼 빛나는 것이다.

“꽃길이란, 결국 함께 걷는 사람의 마음에서 피어난다.”

이기순 시인의 ‘꽃길’은 그리하여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이 삶을 걷고 있는가.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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