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란 시인의 시 '햇살의 다짐' ㅡ햇살이 건네는 다짐의 윤리, 그리고 시인의 미학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엄영란 시인의 시 '햇살의 다짐' 202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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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다짐
시인 엄영란
사르르 녹는
솔잎 위 눈처럼
봄꽃을 부르는 이슬로
그렇게 살겠어요
메마른 둔덕에
혈맥으로 흐르는 봄비 되어
잎 윤슬에 미끄러져 굴러도
하얗게 부서져 웃겠어요
우리는 서로
낮은 자리에서 피는 꽃
숯검정 된 가슴 안고
늦은 귀가 길
목 빼고 서서
화사하게 웃는 인등
인생 꽃
한여름 진흙 밭에 피는 연꽃
어둠을 밝히는 연등처럼
설익은 열매
반사된 빛까지 모아
남은 열정으로
단맛 호호 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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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건네는 다짐의 윤리, 그리고 시인의 미학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엄영란 시인의 ‘햇살의 다짐’이
벨기에의 아투니스 겔럭시 포이트리에 소개되었다.
축하할 일이다.
이 시는 생을 향한 다짐을 ‘빛의 변주’로 풀어내는 시다. 햇살, 이슬, 봄비, 연등, 연꽃 등 자연의 이미지는 모두 ‘따뜻하게 존재하되, 스스로 녹아 사라지며 타인을 밝히는 삶’이라는 시인의 가치철학을 품고 있다. 시의 중심에는 화려함이나 겉멋이 아닌, 낮은 자리에서 빛이 되는 사람의 윤리가 담겨 있다.
이것이 엄영란 시인이 오래 붙들어온 생의 태도이며,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미의식이다.
첫 연의 “솔잎 위 눈처럼 사르르 녹아 / 봄꽃을 부르는 이슬로 살겠다”는 선언은, 자기 소멸을 통해 타인을 살리는 존재의식이다. 녹는다는 말은 약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따뜻함을 기꺼이 건네는 행위다. 시인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존재일지라도, 그 사라짐이 누군가의 봄을 불러올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충분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는 삶을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맡기는 인의적 겸허함이다.
두 번째 연에서 “메마른 둔덕의 혈맥으로 흐르는 봄비”는 상처와 메마름 속에서도 타인을 적시는 회복의 힘을 의미한다. ‘윤슬에 미끄러져 굴러도 / 하얗게 부서져 웃겠다’는 대목은 완전히 부서지는 순간조차 스스로의 빛을 잃지 않으려는 다짐이다.
여기에는 세파의 거칠음에도 결코 미움을 남기지 않는, 시인의 청명한 정신이 드러난다. 모든 고통의 결을 껴안되 그 고통을 흘려보내는 방식이 온유하고 품이 있다.
“우리는 서로 낮은 자리에서 피는 꽃”이라는 문장은 작품 전체의 윤리적 중심이다. 시인은 삶의 진정한 가치가 높은 자리의 이름이나 장식이 아니라, 낮고 거칠고 어두운 곳에서도 환히 피어나는 인간다움에 있다고 본다.
이 구절이야말로 엄영란 시인의 미의식을 가장 정확히 보여준다. 빛은 높은 데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스스로 피어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후반부의 “숯검정 된 가슴 안고 늦은 귀가 길 / 목 빼고 서서 화사하게 웃는 인등”은 시인이 겪어온 삶의 어둠을 은유한다. 검게 탄 가슴은 상처이며 세월이지만, 인등처럼 밝히는 웃음은 그 상처를 품고도 흘러나오는 인간의 선함이다. 인생을 피워내면서도, 더럽혀진 진흙 속에서 연꽃처럼 다시 환하게 올라오는 회복의 힘. 시인은 삶을 결코 낭만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마지막 연의 “설익은 열매의 반사된 빛까지 모아 단맛 호호 불겠다”는 문장은 소박한 삶의 철학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빛, 미완의 삶, 어설픈 서툼까지도 모아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건네려는 태도. 삶의 성숙은 완성에 있지 않고, 미완의 순간에서도 타인을 향한 온기를 잃지 않는 품성에 있음을 시인은 말한다.
요컨대, ‘햇살의 다짐’은 화려함이 아닌 낮음에서, 완벽이 아닌 온기에서, 자기 확장이 아닌 자기 소멸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시인의 존재론적 고백이다. 엄영란 시인은 빛을 외치지 않고 빛을 살아내는 이다.
이 다짐의 시학(詩學)은 자연의 이미지 속에서 맑고 투명하게 살아 움직이며, ‘남을 위해 따뜻하게 사라지는 삶’이라는 소중한 가르침으로 독자의 마음에 길게 남는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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