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영혼의 눈을 닦는 시학 ― 시인 허형만 문학의 깊이와 온도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영혼의 눈을 닦는 시학 ― 시인 허형만 문학의 깊이와 온도 2025.12.03
영혼의 눈을 닦는 시학  ― 시인 허형만 문학의 깊이와 온도

영혼의 눈을 닦는 시학

― 시인 허형만 문학의 깊이와 온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형만 시인의 글과 시를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맑게 닦여진 영혼의 눈’이다. 그는 늘 존재의 표면보다 그 속에 깃든 떨림을 먼저 보려는 사람이다.

하여,

그의 문학은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소한 순간에서 감동을 발견하고, 일상 속에서 우주적 의미를 이끌어 올린다. 그의 글이 유난히 따뜻하고, 조용하며,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허형만 시인의 시학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는 행위’, 즉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성실한 태도 위에서 형성된다.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 냄새와 물 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ㅡ허형만, 「영혼의 눈」 전문

허형만 시인은 세계를 대하는 자신의 원칙을 ‘영혼의 눈’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안경알을 닦듯 영혼도 매일 닦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삶의 준칙에 가깝다. 새로 태어난 하루와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영혼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단정한 태도는 그의 시 전편을 관통한다. 세상을 보는 눈은 대상을 판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진실한 숨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 있어야 한다. 허형만 시인의 시는 이러한 ‘투명함의 윤리’에서 탄생한다.

루미의 시에서 인용된 “당신도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는 문장은 허형만 시인 문학 전체를 비추는 한 줄의 거울과 같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향해 걸어간다.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사람, 꽃, 바람, 별빛—이 결국 우리를 완성시키는 조각들이다. 허형만은 이 ‘만남의 신비’를 언제나 시의 중심에 둔다. 만남이란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향한 오랜 시간의 걸음이 만들어낸 필연이라는 것. 그의 시는 이 필연의 순간을 기록한다.

‘영혼의 눈’에서 보첼리의 노래를 들으며 시인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 더 깊이 본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시각을 잃은 사람이 소리로 나무의 속잎을 보듯, 허형만은 외면의 정보보다 내면의 감각을 먼저 신뢰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감동은 언제나 가슴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는 마지막 문장은 진실 앞에서 겸손해지는 한 인간의 태도다. 눈을 감는 것이 외려 더 깊이 보는 일일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독자로 ‘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덴마크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 솔벵에 갔네

이백 십여 년 전 세워진 산타 아이네스 성당에 들어가

잠시 묵주기도를 드리고 마당에 나오니

뜨락 한쪽 양귀비꽃이 나를 환히 반겨주었네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별빛과 안개를 털어냈을까

몇 광년의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었을까

양귀비꽃은 나의 볼에 입을 맞추어주었네

은은한 감촉이 촉촉했네

나는 눈을 감았네

이 눈물겨운 만남의 신비를 어찌할까

사랑이여

잠시나마 그대와 함께 있기 위하여

칠십 평생이 걸렸구나

ㅡ허형만, 「양귀비꽃」 전문

‘양귀비꽃’은 만남의 신비를 노래하는 시인 허형만 시 세계의 정점이다. 덴마크 솔뱅의 성당에서 나와 마당에서 양귀비꽃과 마주한 순간, 시인은 “칠십 평생이 걸렸구나”라고 고백한다. 한 송이 꽃과의 만남을 위해 걸어온 평생의 시간. 이 시간의 밀도가 한순간에 응축되는 경험이 바로 허형만 시인이 말하는 은총의 순간이다. 꽃은 시인을 향해 다가오고, 시인은 그 꽃을 향해 걸어왔다. 이 교차의 지점에서 시인은 명확히 깨닫는다. 세상 모든 만남은 길을 헤맨 끝에 찾아온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영혼의 깊은 자리에서 오래전에 약속된 인연이라는 사실을.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 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ㅡ허형만, 「겨울 들판을 거닐며」 전문

‘겨울 들판을 거닐며’는 허형만 시인의 윤리적 시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겨울 들판은 아무것도 품지 않은 황량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이미 봄이 준비되고 있다. 얼음 아래에서 초록이 꿈틀거리고, 땅속에서는 온기가 남아 순환을 이어가고 있다. 이를 통해 시인은 섣부른 판단의 위험을 말한다.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사람을 규정하고, 상처를 드러내지도 않은 이에게 냉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의 습관을 돌아보게 한다. 겨울 들판처럼 사람도 그렇다. 겉이 비어 보인다고 속까지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조용히 기다리고 인내하며 제철을 준비하는 마음들이 그 안에 있다. 시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허형만 시인의 문학은 세 가지 신비 위에 세워진다. 그는 이를 ‘빛과 소리의 신비’, ‘만남의 신비’, ‘은총의 신비’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는 그에게 시를 쓰는 근원이며, 삶을 지탱하는 원천이다. 빛은 세계를 비추는 동시에 영혼의 방향을 가리키고, 소리는 마음의 진동을 가장 순정한 형태로 전한다. 만남은 세계를 열어주는 문이며, 존재를 성장시키는 힘이다. 그리고 은총은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선물처럼 어느 날 불현듯 삶을 적셔 주는 축복이다.

이 세 가지 신비가 시인 허형만 시의 정서적 토대이자 존재론적 중심이 된다.

허형만 시인의 글을 읽으면 세계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가 말한 것처럼, 영혼의 눈을 먼저 닦아야 새로운 하루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시는 독자의 시선을 낮추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사소한 것에서 신비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대단한 말 없이 감동을 주며, 과장 없이 영혼을 흔든다. 허형만 시인의 시는 ‘설명하는 문학’이 아니라 ‘빛을 비추는 문학’이다. 그 빛은 눈을 찌르는 방식이 아니라, 마음속 어두운 모퉁이를 천천히 밝혀주는 방식이다.

요컨대, 시인 허형만 문학의 본질은 하나로 귀결된다. 세계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신비를 깨닫는 겸손한 눈.

그는 시를 통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동시에, 세계 또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 만남의 지점에서 태어나는 떨림이 바로 그의 시다. 시인 허형만의 시를 읽는 일은 영혼을 닦는 일이며, 삶의 먼지를 털고 다시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우리에게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체험을 남긴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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