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란 시인의 시 <주머니 속 꿈> ― 찢김 이후에 피어나는 빛의 미학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엄영란 시인의 시 <주머니 속 꿈> ― 찢김 이후에 피어나는 빛의 미학 2025.12.21
□ 엄영란 시인의 시집 《바람글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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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 꿈
시인 엄영란
햇살이 문질러 읽는 헤진 주름
바람은 찢긴 마음을 가만히 꿰맨다 구겨진 주머니 속 오래된 꿈 하나
바닥에 닿을수록 닳은 무릎, 주름은 깊어
찢긴 자리마다 꿈 빛이 시리다
살며시 꿰맨 상처의 실밥 위로 비틀대는 하루가 눕는다
다시 줄을 잡고 일어서면
가시 찔린 기억들이
햇살에 매달려 내일을 말린다
찢겨도 버리지 못하는 이유,
꿰맨 내일이 빛나는 너처럼
부서진 마음을 깁던 바늘땀 위에
별꽃 꿈
피어 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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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란 시인의 시 <주머니 속 꿈>
― 찢김 이후에 피어나는 빛의 미학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엄영란 시인의 시 <주머니 속 꿈>은 현실적 고단함과 심연의 상처를 피하지 않는 시다. 허나 그 상처를 절망의 종착점으로 두지 않는다. 이 작품은 버려질 것들을 붙잡고, 찢긴 주머니의 틈새에서 빛을 이끌어 올리는 작품이다.
엄영란 시인의 삶의 가치철학—“상처는 불완전함의 증거가 아니라, 빛이 스며드는 창”—이 이 시의 전면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그녀의 시적 미의식과 형식적 지향이 만나는 자리다.
시의 첫 연은 시간의 침식을 감각의 언어로 환기한다. “햇살이 문질러 읽는 헤진 주름”이라는 표현은 주름을 늙음이나 퇴락頹落의 부호로 보지 않는다. 햇살이 만짐으로써 주름은 읽히는 문장으로 변하고, 시간은 소멸의 방향에서 존재 증명의 방향으로 전환된다. “바람은 찢긴 마음을 가만히 꿰맨다” 또한 동일한 방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손길이 상처를 감싼다. 가장 낮고 어두운 자리에 늘어선 언어들이, 결핍을 치유의 턱걸이로 삼는다.
이렇게 첫 연은 시 전체의 감각적 지형을 이룬다. 어둠의 기척을 그대로 드러내되,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척박한 현실은 배경이 아니라 출발점이며, 사건이 아니라 마음의 흐름이다.
둘째 연에서 시는 현실성에 깊이를 더한다. “바닥에 닿을수록 닳은 무릎, 주름은 깊어”라는 구절은 육체의 피로를 존재의 진실과 접촉시키는 장면이다. 낮아짐을 추락으로 보지 않고, 무릎을 꿇는 행위를 삶의 바닥과 맞닿는 감각으로 바꾼다. 이어지는 “찢긴 자리마다 꿈 빛이 시리다”는 문장은 이 시의 핵심정신을 압축한다. 찢김이 곧 빛이다.
파괴가 곧 가능성이다. 절망이 곧 희망의 형체다. 엄영란 시인의 시 세계는 상처와 빛의 분리선을 무너뜨린다. 빛은 상처를 피해 흐르지 않고, 그 상처를 통과함으로써 제 빛깔을 얻는다.
셋째 연에서도 존재의 흔들림을 외면하지 않는다. “비틀대는 하루”라는 말은 실패와 흔들림을 정직하게 끌어안는다. 그러나 그 비틀거림은 쓰러짐의 전조가 아니라, 다음 걸음을 향한 균형의 과정이다. 시인은 하루를 눕힌다. 눕힌다는 것은 포기나 단절이 아니라, 휴식과 연결의 동작이다.
그 위에 “꿰맨 상처의 실밥”을 놓음으로써 상처는 봉합되지 않은 흉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조직으로 바뀐다. 생은 완결된 결정체가 아니라 불완전한 진행형이다. 이 불완전성을 긍정할 때, 인간의 삶은 비로소 진실한 무늬를 갖는다.
넷째 연은 기억의 뿌리들을 흔든다. “가시 찔린 기억들이 햇살에 매달려 내일을 말린다.” 기억은 흔히 무게이며 방해물이지만, 이 시에서는 반대로 내일을 기르는 근육이 된다. 햇살에 매달려 말려가는 내일은, 희망을 낭만적으로 상상하지 않는 시인의 태도다. 삶은 자연히 익어가는 향긋한 과실이 아니라, 매달아 두어야 겨우 살아남는 천조각 같은 것.
시인 엄영란 시학의 정직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희망의 축조는 고통의 잔여물 위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인식.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존재의 운동성을 빛의 형상으로 되돌린다. 찢겨도 버리지 못하는 꿈. 부서져도 붙잡고 서는 내일. 그리고 “바늘땀 위에 피어 있는 별꽃 꿈.” 이 표현은 삶의 근원을 다시 감각으로 끌어올리는 언어적 장치다. 별은 멀리 있지만, 별꽃은 가까이에 있다.
별은 영원의 상징이지만, 꽃은 순간의 기쁨이다. 이 둘의 결합은 시간과 존재의 결속을 드러낸다. 순간 속에 영원이 있고, 상처 속에 꿈이 있다. 찢어진 자리마다 스며드는 빛—이것이 엄영란 시인의 문학적 가치관이며,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윤리다.
<주머니 속 꿈>은 짙은 감상에 기대지 않는다. 슬픔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날것의 언어를 정제된 감각에 얹어, 고통과 희망이 동등하게 호흡하는 물질적 현실로 옮긴다. 삶은 무릎이 닿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고, 꿈은 손때 묻은 주머니 속에서 더 오래 숨을 쉰다.
이 시는 독자에게 묻는다. 찢긴 자리마다 숨어 있는 꿈빛을 보았는가. 우리는 버릴 수 없는 무언가를 이미 품고 있는가.
엄영란 시인의 시는 이렇게 결론을 남긴다.
빛은 멀리 있지 않다.
찢긴 주머니 속, 오래된 흉터 위에서
오늘도 아주 작게 피어나고 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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