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김선영 시인의 시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김선영 시인의 시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 2026.01.01
김선영 시인의 시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

■ 김선영 시인의 시집 《그림 속 나무》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

시인 김선영

꽃아

너는 지금 얼굴이 없다.

봄이 가려 얼굴 없다

바람이 품어가지 않았는데

꽃자리에 얼굴 지워졌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네가 네 안 깊이

묻어 놓았다

나는 나의 얼굴을 빌려주리라

가만히 네 꽃 있던 자리

들어서리라

마지막 꽃의 문을 네가

열어 놓았으니

네가 내어준 양

네가 피운 꽃처럼

진실로 네가 오기까지

네 꽃자리

지켜주리라

김선영 시인의 시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선영 시인의 시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존재의 윤곽을 또렷이 만드는 시다.

이 시에서 ‘얼굴’은 정체성의 표지標識이자 세계에 자신을 내놓는 방식이다. 그런데 시는 그 얼굴이 없다고 말하는 데서 출발한다. “너는 지금 얼굴이 없다.” 이는 결핍의 진술이 아니라, 스스로를 감추는 선택의 언어다. 꽃은 봄이 가려서, 바람이 품지 않아서 얼굴을 잃은 것이 아니다. “네가 네 안 깊이 / 묻어 놓았다”는 구절에서 보듯, 얼굴 없음은 외부의 폭력이나 우연이 아니라 자기 결정의 결과다.

이 시의 세계에서 바람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보통 바람은 꽃을 흔들고 꽃의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는 매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바람이 부재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꽃은 얼굴을 묻는다. 이는 외부의 인정을 기다리지 않는 태도이며,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 존재의 품격이다. 김선영 시인의 꽃은 보여지기 위해 피지 않는다. 오히려 감추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킨다. 이 절제의 태도가 시 전체를 단단하게 지탱한다.

후반부에서 화자는 뜻밖의 결단을 내린다. “나는 나의 얼굴을 빌려주리라.” 여기서 ‘빌려준다’는 표현은 이 시의 윤리적 핵심이다. 내 얼굴을 얹되, 그것을 소유로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의 행위는 있지만, 대체는 아니다. 화자는 꽃의 자리에 서지만 꽃을 밀어내지 않는다. “가만히 네 꽃 있던 자리 / 들어서리라”는 문장은 사랑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행위여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사랑은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빈자리를 존중하는 태도다.

“마지막 꽃의 문”이라는 표현은 이 시가 도달하는 깊이를 잘 드러낸다. 문은 언제나 경계다. 들어감과 머묾, 열림과 닫힘의 긴장이 동시에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문을 연 주체가 끝까지 ‘꽃’이라는 점이다. 화자는 문을 열지 않는다. 열어 둔 문 앞에 서서 지켜줄 뿐이다. “네가 내어준 양 / 네가 피운 꽃처럼”이라는 구절에서 시는 관계의 비례를 정확히 지킨다. 받은 만큼만 내어주고, 허락된 자리만큼만 머무른다. 이 균형 감각이 시를 감상적이지 않게 만든다.

김선영 시인의 시어는 분명 가녀리다. 그러나 그 가냘픔은 바람에 쉽게 꺾이는 연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얇지만 질긴 실처럼, 오래 견디는 힘을 지닌다. 시는 낮은 음성으로 말하고, 수줍은 미소로 다가오지만, 그 중심에는 분명한 심지가 있다.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 단단해지는 서정,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오래 남는 사랑. 이 시는 그 역설을 끝까지 밀고 간다.

요컨대,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는 사랑을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로 다룬다. 지켜주는 일, 기다리는 일, 자리를 넘보지 않는 일. 김선영 시인의 시는 그 모든 것을 조용한 언어로 수행한다.

하여,

이 시는 화려하지 않다. 오래 남는다. 얼굴을 내세우지 않은 자리에서, 가장 진실한 얼굴이 비로소 드러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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