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박철언 시인의 시 '세모(歲暮), 그리고 원단(元旦)' — 공적 책임에서 사적 성찰로, 시간을 접고 다시 여는 시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박철언 시인의 시 '세모(歲暮), 그리고 원단(元旦)' — 공적 책임에서 사적 성찰로, 시간을 접고 다시 여는 시 2026.01.03
박철언 시인의 시 '세모(歲暮), 그리고 원단(元旦)' — 공적 책임에서 사적 성찰로, 시간을 접고 다시 여는 시

세모(歲暮), 그리고 원단(元旦)

시인 청민 박철언

서서히 접혀가는 한 해

나는 어디만큼 왔을까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이고

가장 슬폈던 사연은 무엇인가

보람 있었던 일과 잘못했던 일은

놔야 할 것과 잡을 것은 무엇인가

어떤 길은 열었지만

대답을 잃고 꿈꾸길 포기한

아직도 막힌 길

여전히 매듭 못 푼 시류

아직 못 다 부른 노래

이젠 풀고 넘겨야 할 해갈이

새해엔 더욱 건강해야지

좋은 글감 찾아 형형하게 눈 떠 더 좋은 글을 써 봐야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 내 조국도 사랑해야지

싱싱한 첫해의 첫발자국으로

또다시 맑게 눈 뜨고

희망의 푸른 새 역사

힘차게 써내려 가길

박철언 시인의 시 ‘세모(歲暮), 그리고 원단(元旦)’

— 공적 책임에서 사적 성찰로, 시간을 접고 다시 여는 시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청민 박철언 시인의 ‘세모(歲暮), 그리고 원단(元旦)‘은 한 개인의 연말연시 소회에 머물지 않는다. 이 시는 국가의 시간 속에서 살아온 한 공직자의 삶이, 문학의 언어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장면이다. ‘서서히 접혀가는 한 해’라는 첫 문장은 개인적 회고처럼 보이지만, 그 배경에는 수십 년간 공적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온 시간의 무게가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이 시에서 반복되는 질문들—가장 기뻤던 일과 가장 슬펐던 사연, 보람과 과오, 놓아야 할 것과 붙들어야 할 것—은 감정의 나열이 아니다. 이는 결정을 업으로 살아온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의 방식이다. 법조인으로서, 공직자로서 그는 늘 선택해야 했고, 판단해야 했으며,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이 시의 성찰은 가볍지 않다. 삶을 미화하지 않고, 공과를 함께 꺼내 놓는 태도에는 공적 삶이 길러낸 절제와 책임의 윤리가 깔려 있다.

“대답을 잃고 꿈꾸길 포기한 / 아직도 막힌 길”이라는 고백은 공직의 자리에서 마주했던 현실의 한계와도 맞닿아 있다. 모든 길이 열리지 않았고, 모든 문제에 답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그는 인정한다.

허나, 그 인정은 체념이 아니라 성숙한 수용이다. 매듭을 다 풀지 못했음을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용기, 다 부르지 못한 노래를 남겨 두는 태도는, 권한을 내려놓은 이후에야 가능한 깊은 자성이다.

시의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다짐 또한 주목할 만하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 다른 사람 내 조국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은 공직자로 살아온 그의 윤리적 중심을 명확히 드러낸다. 자기 성찰이 공동체 사랑으로 확장되는 이 문장은, 개인적 소망과 공적 책임이 분리되지 않는 삶의 철학을 보여준다.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사회와 국가를 향해 열려 있다.

‘세모, 그리고 원단’의 미의식은 선언보다 준비에 가깝다. “싱싱한 첫해의 첫발자국”은 새 출발의 과시가 아니라, 다시 쓰는 삶의 초안이다. 이제 그는 법과 제도의 언어가 아니라, 문학의 언어로 시간을 기록한다. 그러나 그 문학은 현실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외려 공적 삶에서 축적된 책임감과 절제가 시의 뼈대를 이룬다.

이 시는 말한다.

한 공직자의 삶은 퇴임으로 끝나지 않으며, 문학은 그 이후의 시간을 가장 정직하게 증언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해를 접고 다시 여는 이 시는, 박철언이라는 한 인간이 국가의 시간에서 개인의 성찰로 이동하는 조용한 전환의 기록이며, 그 절제된 품격이 이 작품을 오래 남게 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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