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만 시인의 시 <파도> — 파도에 불을 붙이는 시인의 윤리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허형만 시인의 시 <파도> — 파도에 불을 붙이는 시인의 윤리 2026.01.03
■
파도
시인 허형만
파도를 보면
내 안에 불이 붙는다
내 쓸쓸함에 기대어
알몸으로 부딪치며 으깨지며
망망대해
하이얗게 눈물꽃 이워내는
파도를 보면
아, 우리네 삶이란
눈물처럼 따뜻한 희망인 것을
■
허형만 시인의 시 <파도>
— 파도에 불을 붙이는 시인의 윤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형만 시인의 <파도>는 자연을 바라보는 감상의 시가 아니다. 이 짧은 시에서 파도는 풍경이 아니라 삶을 각성시키는 존재의 장치다.
시인은 파도를 ‘보는’ 순간, 내면에 불이 붙는다고 말한다. 이는 자연이 감정을 위로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생을 다시 작동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파도는 여기서 철저히 몸의 언어로 제시된다. “알몸으로 부딪치며 으깨지며”라는 표현은 생의 조건을 가리지 않는다. 보호도, 장식도 없는 상태로 세계와 맞서는 존재의 방식이다.
파도는 망망대해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부딪히고, 부서지고, 끝내 “하이얗게 눈물꽃”을 피워 올린다. 이 눈물은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버텨낸 흔적이 만들어내는 빛이다.
시의 마지막 전환은 허형만 시인의 문학적 윤리를 가장 잘 드러낸다. “아, 우리네 삶이란 / 눈물처럼 따뜻한 희망인 것을.” 삶을 희망이라 말하되, 그 희망을 눈물과 분리하지 않는다.
허형만 시인의 희망은 낙관이 아니라 통과한 고통의 온기다. 그래서 이 시는 강하다. 희망을 외치지 않고, 눈물의 온도를 정확히 짚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시인의 삶과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허형만 시인은 한평생 대학 강단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말보다 태도로 제자들을 이끌어온 큰 스승이다. 그의 문학에는 과시가 없고, 중심에 서려는 욕망도 없다. 늘 낮은 자리에서,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파도를 보며 불이 붙는다는 고백 역시, 세계를 향한 겸손한 개입이다.
허형만 시인의 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삶을 드러낸다. 파도처럼 부딪치되 원망하지 않고, 부서지되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시와 삶이 오래 신뢰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맑은 영혼, 겸손의 미덕, 그리고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파도>는 그 모든 것을 단 몇 줄로 증명하는, 작지만 깊은 시다.
ㅡ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