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얼굴을 묻는 방식으로 세계를 건너는 시인 ― 김선영 시의 자기은폐적 서정과 관계 윤리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얼굴을 묻는 방식으로 세계를 건너는 시인 ― 김선영 시의 자기은폐적 서정과 관계 윤리 2026.01.08
얼굴을 묻는 방식으로 세계를 건너는 시인 ― 김선영 시의 자기은폐적 서정과 관계 윤리

□ 김선영 시인

□ 김선영 시인 시집 《풀꽃 왕관》

얼굴을 묻는 방식으로 세계를 건너는 시인

― 시인 김선영 시의 자기은폐적 서정과 관계 윤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들어가는 말

시를 읽는 일은 언제나 말보다 태도를 먼저 만나는 일이다. 어떤 시는 단번에 의미를 내보이며 독자의 이해를 요구하지만, 어떤 시는 끝까지 자신을 설명하지 않은 채 독자의 자세를 시험한다. 김선영의 시는 분명 후자에 속한다.

그의 시는 의미를 앞세우지 않고, 감정을 과시하지 않으며, 주체를 전면에 세우지 않는다. 외려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드러내지 않음의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 맺는다. 이 조심스러운 태도는 단순한 성향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시 전반을 지탱하는 미학이자 윤리다.

김선영의 시를 관통하는 핵심은 ‘말하지 않음’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지 않을 것인가’에 있다. 그는 침묵을 공백으로 방치하지 않고, 하나의 적극적인 선택으로 다룬다. 그의 시에서 낮음은 열등함이 아니며, 물러섬은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취한 거리 조절의 방식이며, 세계를 소유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윤리적 결정이다. 이러한 태도는 빠른 발화와 강한 자기 표명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오늘의 언어 환경 속에서 더욱 선명한 의미를 획득한다.

특히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는 김선영 시의 이러한 시학이 가장 응축된 작품이다.

이 시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얼굴 없음’은 결핍이나 상실의 표상이 아니라, 자기 노출을 유예하는 존재의 선택이다. 얼굴을 묻는 행위는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결단이며, 관계를 성급히 소유하지 않으려는 윤리적 태도다.

본고는 이 시를 중심으로 김선영 시의 미학과 윤리, 그리고 그 삶의 태도를 살피고자 한다.

꽃아

너는 지금 얼굴이 없다.

봄이 가려 얼굴 없다

바람이 품어가지 않았는데

꽃자리에 얼굴 지워졌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네가 네 안 깊이

묻어 놓았다

나는 나의 얼굴을 빌려주리라

가만히 네 꽃 있던 자리

들어서리라

마지막 꽃의 문을 네가

열어 놓았으니

네가 내어준 양

네가 피운 꽃처럼

진실로 네가 오기까지

네 꽃자리

지켜주리라

ㅡ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 >시 전문

  1. ‘얼굴 없음’의 시학: 결핍이 아닌 선택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는 처음부터 세계의 기대를 비껴선다. “너는 지금 얼굴이 없다”라는 문장은 결핍의 보고서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방식에 대한 선언이다. 이 시에서 얼굴은 빼앗기지 않는다. 가려지지도 않는다. 조용히, 의식적으로, 자기 안쪽으로 접혀 들어간다. 얼굴이 없다는 말은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꺼내지 않았다는 뜻에 가깝다. 마치 씨앗이 흙속에서 스스로의 형상을 보류하듯, 김선영의 꽃은 자신을 세상 앞에 내놓는 일을 잠시 미룬다.

봄도, 바람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 계절이 가로막아서도 아니고, 관계가 부재해서도 아니다. “네가 네 안 깊이 묻어 놓았다”는 구절은 이 시의 중심을 정확히 짚는다. 얼굴 없음은 환경의 결과가 아니라 주체의 결단이다. 이는 자신을 드러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드러냄이라는 방식 자체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굴은 세계에 자신을 제출하는 가장 빠른 통로이지만, 동시에 가장 쉽게 소모되는 표식이기도 하다. 김선영의 시는 이 표식을 서둘러 내놓지 않는다.

여기서 얼굴은 정체성의 은유다. 이름이 불리고, 시선에 포착되고, 해석되는 자리다. 그러나 이 시에서 얼굴은 앞이 아니라 안에 있다. 바깥을 향하지 않고, 깊이를 향한다. 이는 자기 부정이 아니다. 외려 자기 보존의 방식이다.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닳아 없어지지 않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왜곡되지 않는 존재의 형식이다. 얼굴을 묻는다는 것은 사라지겠다는 뜻이 아니라, 오래 남겠다는 결의에 가깝다.

이러한 자기은폐의 태도는 김선영 시 전반을 관통하는 미학이다. 그의 시는 언제나 한 발 물러서 있으며, 한 겹 감싸져 있다. 그러나 그 물러섬은 두려움이 아니라 절제이고, 그 감춤은 결핍이 아니라 신중함이다. 얼굴을 내세우지 않는 자리에서 오히려 존재의 윤곽은 더 또렷해진다. 마치 안개 속 산이 윤곽을 지우는 대신 깊이를 드러내듯, 김선영의 시는 감춤을 통해 존재의 밀도를 높인다.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에서의 얼굴 없음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보류됨이다. 그것은 세계를 향한 거절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함부로 소모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김선영의 시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얼굴이 없다는 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그리고 그 조용한 선택이야말로 이 시가 지닌 가장 단단한 힘이다.

  1. 바람의 부재와 인정 욕망의 유예

시에서 바람은 흔히 관계의 첫 신호다. 보이지 않지만 먼저 와서 흔들고, 닿지 않았으나 이미 접속을 완료한 힘이다. 꽃을 피우는 것도, 향을 퍼뜨리는 것도 바람의 몫이었다. 그러나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에서 바람은 제 역할을 내려놓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필요해지지 않는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꽃은 얼굴을 묻는다. 이는 관계의 문을 닫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문을 바람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선택에 가깝다.

이 시에서 바람의 부재는 고립의 징후가 아니다. 김선영의 시적 주체가 외부의 호명과 승인에 자신을 위탁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바람은 타자의 시선이며, 세상의 평판이며, 인정의 순풍이다. 많은 존재는 이 바람을 기다리며 얼굴을 세운다. 그러나 김선영의 꽃은 그 순서를 뒤집는다. 바람이 오기 전에 이미 자신을 안쪽으로 접어 두고, 불리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다. 얼굴을 드러내는 조건을 외부에 두지 않겠다는 태도, 그것이 바람의 부재가 품은 의미다.

여기서 인정 욕망은 억압되거나 부정되지 않는다. 다만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김선영의 시적 주체는 타자의 시선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등지지 않고, 관계를 차단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 시선이 자신을 규정하는 위치로 올라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인정에 대한 금욕이 아니라, 인정에 대한 유예다. 지금 당장 불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 흔들리지 않아도 존재가 유지된다는 확신이다.

이 유예의 태도는 관계의 윤리를 보존한다. 바람이 먼저 와 꽃을 흔들 때, 관계는 종종 속도를 잃는다. 기대는 앞서가고, 의미는 소모된다. 김선영의 시는 이 조급함을 경계한다. 그는 바람이 오기 전에 자리를 지키고, 불리지 않은 상태에서도 서 있는 법을 택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요란한 접속 대신 조용한 공존이 남는다.

바람의 부재는 단절이 아니라 자립의 형식이다. 김선영의 꽃은 바람이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 고요 속에서 존재의 중심을 단단히 고정한다. 인정이 오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 불리지 않아도 자신을 잃지 않는 태도. 이 시에서 바람은 불지 않지만, 세계는 닫히지 않는다. 다만 더 천천히, 더 깊게 열릴 뿐이다.

3 빌려주는 얼굴’과 관계 윤리

시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조심스러운 결단을 내린다. “나는 나의 얼굴을 빌려주리라.” 이 문장은 이 작품이 도달한 윤리의 정점이다. 얼굴은 건네지되, 넘겨주지 않는다. 주어지되, 소유되지 않는다. ‘빌려준다’는 말에는 명확한 선이 그어져 있다. 대신하지 않겠다는 약속, 침범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김선영의 시에서 관계는 결코 합일이나 대체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분명한 거리 위에서만 지속된다.

얼굴은 정체성의 가장 앞면이다. 세계와 가장 먼저 맞닿는 표정이며, 타인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다. 그 얼굴을 ‘빌려준다’는 행위는 자신을 지워 상대를 대신 서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잠시 그 자리를 지켜주겠다는 윤리적 태도에 가깝다. 화자는 꽃이 돌아올 자리를 비워 둔 채, 그 시간만을 감당한다. 이때 관계는 소유의 언어를 벗고, 책임의 형식으로 전환된다.

“가만히 네 꽃 있던 자리 / 들어서리라”에서 ‘가만히’라는 부사는 이 시의 미학을 압축한다. 움직이되 흔들지 않고, 다가가되 앞서지 않는다. 김선영의 시적 주체는 타인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그는 빈자리를 존중하고, 허락된 거리만큼만 들어선다. 이 조심스러움은 주저함이 아니라 정확함이다.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 선택한 가장 낮은 속도다.

김선영에게 사랑은 돌진이 아니다. 그것은 조율이며, 속도의 합의다. 앞서 나아가는 열정이 아니라, 비켜 서는 용기다. 그는 상대의 이름을 대신 부르지 않고, 상대의 얼굴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감정의 과잉이 없다. 울음을 재촉하지 않고,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지켜보는 시간, 기다리는 자세, 물러선 자리의 온기가 남는다.

이러한 관계 윤리는 김선영의 시를 감상적 서정과 분명히 구분 짓는다. 그의 시에서 사랑은 소유의 완성이 아니라 존중의 지속이다. 얼굴을 빌려주되 되돌려줄 줄 아는 태도, 자리를 대신 지키되 끝내 비워 둘 줄 아는 윤리. 그 조용한 결단 속에서 김선영의 시는 가장 단단한 사랑의 형식을 완성한다.

  1. 절제의 미학과 비감상성

김선영의 시어는 가늘고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 가늘음은 쉽게 끊어질 실이 아니라, 오래 버티기 위해 매듭을 최소화한 실에 가깝다. 그는 감정을 언어로 탕진하지 않는다. 슬픔을 절규로 폭발시키지 않고, 사랑을 선언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말이 앞서지 않도록 감정을 뒤로 물리고, 감정이 앞설 때 언어를 낮춘다. 이 선택은 표현의 빈곤이 아니라, 지속을 위한 전략이다. 감정이 언어에 과도하게 소비될수록 시는 빠르게 낡는다. 김선영은 그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춘다.

그의 시에서 감정은 표정이 아니라 자세로 드러난다. 울음은 문장으로 흘러넘치지 않고, 기다림의 시간 속에 고여 있다. 사랑은 고백의 음성으로 울리지 않고, 지켜봄의 거리로 유지된다. 이때 감정은 소리보다 무게를 얻고, 표정보다 온도를 갖는다. 김선영의 절제는 감정을 억압하는 금욕이 아니다. 감정이 스스로 숨 쉴 수 있도록 여백을 마련하는 배려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남겨지는 감정의 잔향이 그의 시를 지탱한다.

이러한 비감상성은 독자에게도 동일한 태도를 요청한다. 그의 시는 즉각적인 감동을 제공하지 않는다. 읽는 순간 눈물을 요구하지도, 의미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대신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자리를 건넨다. 독자는 그 자리에서 속도를 조절하고, 자신의 호흡으로 문장을 건너가야 한다. 김선영의 시를 읽는 일은 소비가 아니라 체류에 가깝다.

이 체류의 시간 속에서 감정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독자는 시가 마련한 여백에 자신의 기억과 감각을 겹쳐 놓는다. 하여, 그의 시는 읽을 때마다 다르게 반응한다. 감동이 즉시 발생하지 않는 대신, 시간이 지난 뒤 문득 되돌아와 말을 건다. 이는 김선영이 선택한 절제의 미학이 도달한 결과다. 감정을 과시하지 않음으로써 더 오래 남는 감정,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어지는 의미. 김선영의 비감상성은 시를 조용히 만들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시는 끝내 지워지지 않는다.

맺음말

김선영의 시는 끝내 자신을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시를 통해 세계를 설득하거나 감정을 주장하지 않으며, 독자 앞에 자신의 얼굴을 내밀지도 않는다. 그의 시는 끝까지 물러서 있는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 물러섬은 부재가 아니라 존재의 또 다른 형식이다. 김선영은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세계와의 관계를 지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언어의 윤리를 보존한다.

「네 꽃대 위에 내 얼굴 얹어」에서 제시된 ‘얼굴 없음’은 김선영 시의 핵심 개념이다. 이는 상실이나 결핍이 아니라 자기 노출을 유예하는 선택이며, 외부의 승인에 자신을 맡기지 않겠다는 존재의 결단이다. 그의 시는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외려 감추는 방식으로 자신을 유지하고, 침묵을 통해 관계의 깊이를 확보한다.

시인 김선영의 시는 삶의 기술에 가깝다. 어떻게 드러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넘어서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관계를 소유하지 않고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사유다. 얼굴을 내세우지 않은 자리에서 가장 단단한 윤리가 형성되고, 가장 오래 기억되는 언어가 태어난다. 김선영의 시는 그렇게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한국 현대시의 한 지점을 지켜내고 있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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