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금도 녹을 닦는 허형만 선생님께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지금도 녹을 닦는 허형만 선생님께 2026.01.25
지금도 녹을 닦는 허형만 선생님께

지금도 녹을 닦는 허형만 선생님께

청람 김왕식

선생님,

봄이 오기 전의 바람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세상은 아직 차갑고

손끝은 먼저 깨어납니다.

저는 가끔

대문에 앉은 녹을 생각합니다.

그 녹은 철에만 슬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세월에도 조용히 붙어 있음을

선생님 시에서 처음 배웠습니다.

누구나

빛나는 말은 쉽게 모읍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문지르는 손은

쉽게 내밀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그 어려운 일을

가장 고요한 언어로 하셨습니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문지르는 시를

제게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다섯메 오산의 교실에서

그 시를 학생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엔 녹을 보다가

나중엔

자기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교실은 조용히 맑아졌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가르치지 않으면서

사람을 바르게 세웁니다.

설명하지 않으면서

삶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높은 곳을 말하지 않으면서

정신의 높이에 이르게 합니다.

저는 오래도록

선생님을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문장 속의 이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숨결로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이어도문학 심사의 자리에서

기적처럼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제가 꿈이라 믿었던 일이

현실의 의자 하나로

조용히 앉았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선생님을

시인의 이름으로만 부르지 않습니다.

제 인생의 스승으로

마음 깊이 모시고 있습니다.

선생님,

시란 무엇입니까.

저는 이제

그 질문의 답을 멀리서 찾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한 줄의 언어를 다듬는 침묵에서

그 답을 봅니다.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이제

그 질문의 답을

크고 요란한 구호에서 찾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회한과 사랑을 함께 품고

끝내 생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서

그 답을 봅니다.

언젠가

저도 제 삶의 대문을 닦을 때,

손이 아프더라도

부끄러움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

조용히, 끝까지 문지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지켜오신 서정은

세상을 장식하지 않았으나

세상을 살렸습니다.

한 시인의 언어가

이렇게 많은 영혼을

조용히 이끌어 올릴 수 있음을

저는 선생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오늘도

선생님의 시 한 줄이

제 마음의 녹을

가만히 닦아 줍니다.

ㅡ 청람 김왕식 드림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