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새봄의 빛 속에 드리운 시간의 그림자 — 청민 박철언 시인의 《새봄은 왔건만》을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새봄의 빛 속에 드리운 시간의 그림자 — 청민 박철언 시인의 《새봄은 왔건만》을 읽다 2026.03.09
새봄의 빛 속에 드리운 시간의 그림자 — 청민 박철언 시인의 《새봄은 왔건만》을 읽다

□ 청민 박철언 시인

새봄은 왔건만

시인 青民 박철언

동토의 어둠 뚫고

따뜻하게 차오르는 새기운

으스스하지만 한층 부드러워진

이른 봄의 아침 공기

겨울의 온갖 아픔 이겨내고

소리 없이 싹트는 푸른 움

산책길은 봄기운으로

가벼운 연듯빛 발걸음이지만

마음은 왜 이리 무거울까

어두운 소식들 때문인가

팔순을 넘어서니 발 빨라진 소식들

친구들이 입원했다는 귀천했다는

푸른 숨결 반짝이는 새봄 왔어도

더 깊어지고 커가는 외로움

봄은 새로 왔건만

주변 비워져가니 옛 봄이 아니구나

그봄, 어느 노을 속으로 사라졌을까

새봄의 빛 속에 드리운 시간의 그림자

— 청민 박철언 시인의 《새봄은 왔건만》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 《새봄은 왔건만》은 계절의 변화라는 보편적 풍경을 통과하여 노년의 내면에 이른 존재의 감각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한평생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공직과 법조의 현장에서 破邪顯正의 길을 걸어온 시인은, 여생에 이르러 비로소 외부의 질서가 아닌 내부의 시간을 응시한다.

이 시는 그 응시의 기록이며, 삶의 후반에 도달한 한 인간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시의 첫머리는 동토를 뚫고 올라오는 새기운의 감각으로 시작한다.

“동토의 어둠 뚫고 / 따뜻하게 차오르는 새기운”이라는 구절은 계절의 전환을 넘어 존재의 회복을 암시한다.

곧이어 이어지는 “으스스하지만 한층 부드러워진 / 이른 봄의 아침 공기”는 단순한 생명의 환희에 머물지 않는다. 따뜻함과 서늘함이 교차하는 이 공기는 바로 노년의 감각과 닮아 있다. 삶의 온기와 상실의 예감이 동시에 스며드는 자리에서 시는 시작된다.

이어지는 “겨울의 온갖 아픔 이겨내고 / 소리 없이 싹트는 푸른 움”은 생명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다. 그러나 이 생명의 장면은 곧바로 개인의 내면으로 전환된다. “산책길은 봄기운으로 / 가벼운 연둣빛 발걸음이지만 / 마음은 왜 이리 무거울까”라는 대목에서 시는 외부 풍경과 내부 정서 사이의 간극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계절은 가벼워지는데 마음은 무거워지는 이 역설은 노년의 실존적 조건을 절묘하게 압축한다.

시의 중심은 중반부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어두운 소식들 때문인가 / 팔순을 넘어서니 발 빨라진 소식들 / 친구들이 입원했다는 귀천했다는”이라는 구절은 노년의 시간 감각을 가장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여기서 ‘발 빨라진 소식들’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시간의 속도에 대한 은유다. 젊은 시절에는 멀게 느껴지던 이별의 소식이 노년에 이르러서는 일상의 일부가 되는 현실이 간결하게 드러난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는 더욱 절제된 어조로 깊어진다. “푸른 숨결 반짝이는 새봄 왔어도 / 더 깊어지고 커가는 외로움”이라는 구절은 이 시의 정서를 집약한다. 봄의 이미지가 희망을 상징하는 전통적 의미를 지니면서도, 이 시에서는 외려 고독을 부각시키는 장치로 작용한다. 계절은 돌아오지만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시 전체에 잔잔한 울림을 만든다.

마지막 연의 “봄은 새로 왔건만 / 주변 비워져가니 옛 봄이 아니구나 / 그봄, 어느 노을 속으로 사라졌을까”는 회상의 정조를 넘어 존재론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여기서 ‘노을’은 하루의 끝이자 생애의 황혼을 상징하는 고도의 문학적 메타포다. 사라진 것은 계절이 아니라 함께했던 시간이며, 그 시간의 상실이 곧 외로움의 근원임을 시는 조용히 드러낸다.

청민 박철언 시인의 이 작품은 과장되지 않는다. 수사는 절제되어 있고 정서는 고요하다. 그 고요 속에서 시는 더 큰 울림을 낳는다.

평생을 현실의 한가운데서 살아온 시인이 말년에 이르러 선택한 언어는 관조의 언어이며, 그 언어는 체험에서 길어 나온 진정성을 지닌다.

이 시는 봄을 노래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계절 속에서도 상실의 감각을 잃지 않는 시인의 시선은 삶을 깊이 통과한 이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시《새봄은 왔건만》은 노년의 고독을 노래하면서도 비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끝까지 응시하는 태도의 시이며, 떠난 것들을 애도하면서도 남은 시간을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의지의 기록이다.

이 점에서 이 시는 한 인간의 여생이 어떻게 문학적 깊이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秀作이다.

ㅡ 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