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금지된 빛의 짐승, 혹은 기억의 윤리 — 김지수 시인의 《홍양紅羊》을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금지된 빛의 짐승, 혹은 기억의 윤리 — 김지수 시인의 《홍양紅羊》을 읽다 2026.03.09
금지된 빛의 짐승, 혹은 기억의 윤리 — 김지수 시인의 《홍양紅羊》을 읽다

□ 김지수 시인

□ 홍양

홍양 紅羊

시인 김지수

담장 낮은 밤이면

붉은 양 한 마리

산비탈을 기웃거린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제 것인 양

혀를 내밀어 훑어가지만

아침이 오면

검은 발굽 자국만 남는다

울타리는 기억한다

한 번 난 길은 또 난다는 것을

풀은 다시 자라지만

양털에 묻은 냄새는

젖은 종이에 번진 잉크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금지된 빛의 짐승, 혹은 기억의 윤리

— 김지수 시인의 《홍양紅羊》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지수 시인의 《홍양 紅羊》은 처음부터 현실의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어름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상징적 생명이며, 시인은 그 형상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가장 은밀한 결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이야기보다 기운이 먼저 움직이고, 의미보다 정조가 먼저 번지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짧은 행 속에서 긴 여운이 생성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담장 낮은 밤이면 / 붉은 양 한 마리 / 산비탈을 기웃거린다”라는 도입은 현실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라 의식의 틈을 여는 문장이다. 담장이 낮아진 밤은 경계가 느슨해진 시간이며, 그 틈으로 나타나는 붉은 양은 억압된 욕망이거나 오래 숨겨온 기억일 수 있다.

김지수 시인의 시에서 이 형상은 결코 직접 해석되지 않는다. 시인은 끝까지 설명하지 않고, 외려 독자를 그 침묵 속에 세워둔다. 이 절제는 그의 미의식의 핵심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붉은 양은 “풀잎에 맺힌 이슬”을 제 것인 양 훑어간다. 이 행은 존재의 태도를 드러낸다. 그것은 소유가 아니라 잠시 스쳐가는 방식이다.

그 스침은 가볍지 않다. “아침이 오면 / 검은 발굽 자국만 남는다”는 구절에서 시는 윤리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밤의 충동은 사라지지만 흔적은 남는다.

김지수 시인은 이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외려 그것을 작품의 중심으로 끌어올린다.

특히 “울타리는 기억한다 / 한 번 난 길은 또 난다는 것을”이라는 구절은 이 시의 사유를 집약한다. 길은 공간이 아니라 반복의 형식이다. 인간은 같은 선택을 되풀이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며, 같은 그리움을 되풀이한다.

시인 김지수의 시는 그 반복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의 구조임을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여기서 시인의 가치철학이 드러난다. 삶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며, 윤리는 판단이 아니라 자각이라는 태도다.

마지막 연에서 시는 냄새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양털에 묻은 냄새는 / 젖은 종이에 번진 잉크처럼 / 지워지지 않는다.”

이 구절은 이 시의 가장 깊은 미학이다. 냄새는 보이지 않으면서 가장 오래 남는 감각이다.

김지수 시인은 기억을 시각이 아니라 후각의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이 선택은 탁월하다. 보이는 흔적은 지워지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오래 남는다. 시인의 언어는 이처럼 감각의 층위를 바꾸며 의미를 확장한다.

김지수 시인의 삶과 시는 닮아 있다. 대학 강단에서 사유를 가르치는 그의 태도는 작품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는 결론을 말하지 않는다. 물음을 남긴다.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스며들게 한다. 그의 시가 맑다는 평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불필요한 언어를 제거하고 존재의 핵심만 남기는 절제에서 비롯된다.

요컨대, 《홍양》은 실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사는 형상이다. 그것은 욕망이면서 기억이고, 상처이면서 윤리다. 이 시의 힘은 바로 그 모호성에 있다. 김지수 시인은 끝내 해석을 허락지 않는다. 다만 독자로 자신의 홍양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시 《홍양》은 신비롭다기보다 정직하다.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 지워지지 않는 흔적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태도. 김지수 시인의 시는 그 조용한 수락의 형식이며, 동시에 오래 남는 하나의 맑은 물음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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