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시간의 사전에서 만난 이름 ― 김선영 시인을 떠올리며

시간의 사전에서 만난 이름 ― 김선영 시인을 떠올리며 2026.03.14
시간의 사전에서 만난 이름 ― 김선영 시인을 떠올리며

□ 김선영 시인

시간의 사전에서 만난 이름 ― 김선영 시인을 떠올리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가한

토요일 오후였다.

청람 서루 한켠에서

1973년판 『한국문학대사전』을 펼친 날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오래된 책은 언제나 먼저 냄새로 다가온다. 묵은 종이에서 올라오는 건조하면서도 눅진한 향기, 오랜 세월 닫혀 있다가 다시 열릴 때만 흘러나오는 미세한 먼지의 기척, 손끝에 와 닿는 거친 결까지도 하나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는 작게 울었고,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더 고요하게 만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나는 문학사의 두께를 손끝으로 더듬고 있었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다 162~163쪽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김선영 시인의 이름을 만났다. 손이 잠시 멈췄다. 그 순간의 정적은 길지 않았지만 오래 남았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이 조용히 올라왔다. 그것은 단순한 반가움이 아니었다. 한 시인의 시간이 문학사의 자리 속에 온전히 놓였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호흡해 온 동시대인으로서의 묘한 감동이 겹쳐 있었다. 오래된 활자 속에서 이름 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시선을 붙잡힌 채 머물러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전봉건 시인이 극찬한 장시 『탈출하는 살』(1973)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작품이었지만, 사전 속에서 다시 만난 그 제목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활자 몇 줄로 정리된 설명이었지만 그 뒤편에 놓여 있는 시적 시간과 사유의 깊이는 단번에 느껴졌다. 그 장시는 단순한 연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인이 오랫동안 붙들어 온 시간과 상실의 기록이자, 인간 본질을 향한 집요한 탐구의 궤적이었다. 거기에서 ‘삶’은 육체의 살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소모되는 인간의 시간 그 자체였고, 지나간 날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메타포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전봉건 시인의 찬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그 작품을 언어의 노래가 아니라 사유의 구조로 세워진 시라고 평했다. 실제로 『탈출하는 살』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정서의 흐름이 아니라 치밀하게 조직된 메타포의 결이다. 시편들은 흩어져 있는 듯 보이면서도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거대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안에서 상실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시간을 통과하며 필연적으로 겪는 존재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그 시는 슬픔을 말하면서도 비탄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생의 감각으로 나아간다.

그 페이지를 오래 바라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시간을 떠올렸다. 이어도문학회(회장 황성구)에서 같은 시대를 건너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문학의 시간은 늘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때로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시대를 함께 건넌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연도를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공기 속에서 같은 질문을 품고 같은 언어의 무게를 견디며 걸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문득 영광처럼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김선영 시인의 시는 늘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1968년 첫 시집 『사가』에 나타나는 맑고 밝은 서정은 절제된 언어 속에서 투명하게 흐르며 세계를 부드럽게 비추었다. 그러나 『허무의 신발가게』에 이르러 그는 분명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감정을 직접 말하는 대신 메타포로 구조를 세우기 시작했고, 그로써 그의 시는 평면적 서정에서 입체적 사유로 이동했다. 그 변화는 단절이 아니라 축적의 결과였고, 『탈출하는 삶』에서 하나의 결로 응축되었다.

그날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고요하지 않았다. 오래된 사전 속의 한 페이지가 현재의 시간과 겹쳐지며, 문학이란 결국 서로 다른 시간들이 만나 이루는 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록 속에서 다시 숨 쉬고, 현재의 시간은 그 위에 조용히 겹쳐진다. 그렇게 문학은 늘 현재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지금도 가끔 그날을 떠올린다. 책장을 넘기던 손끝의 감각, 활자 위에 멈추던 시선, 그리고 설명할 수 없이 차오르던 감정까지도 함께 돌아온다. 그 기억 속에서 김선영 시인의 이름은 여전히 또렷하다. 오래된 사전 속에 놓여 있으면서도 현재의 시간 속에서 살아 있는 이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빛나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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