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의 시집 앞에서 ㅡ시인 황성구
소월의 시집 앞에서 ㅡ시인 황성구 20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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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의 시집 앞에서
시인 황성구
고요한 밤 책을 펼치니
은은한 향기 가만히 피어오르고
소월의 시혼은
꿈의 문틈으로 살며시 스며드네
세월 깊어도
종이의 흔적은 아직 따스하여
한 줄 한 마디마다
마음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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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다는 것, 한 인간이 기도가 되는 순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황성구 시인의 《소월의 시집 앞에서》는 한 권의 시집을 읽는 행위를 넘어, 시간과 영혼이 만나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조용한 기도의 기록이다.
이 시는 무엇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고요한 밤, 한 사람이 책을 펼치는 순간에 깃드는 보이지 않는 기운을 따라가며, 시와 인간 사이에 흐르는 깊은 숨결을 드러낸다.
첫 행 “고요한 밤 책을 펼치니”는 단순한 상황 제시가 아니다. 이것은 외부의 소음을 거둔 상태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내면의 준비를 뜻한다. 시인은 밤을 배경으로 선택함으로써, 시를 읽는 일이 일상의 연장이 아니라 존재를 낮추고 비워야 가능한 행위임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은은한 향기 가만히 피어오르고”는 시집이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숙성된 정신의 향기임을 감각적으로 환기한다. 이 향기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며, 읽는 이의 내면을 서서히 적신다.
“소월의 시혼은 / 꿈의 문틈으로 살며시 스며드네”라는 구절에서는 이 시의 핵심이 드러난다. 소월의 시는 과거의 텍스트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문틈’이라는 아주 미세한 틈을 통해 현재의 삶으로 스며든다.
여기서 문틈은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기억 사이의 경계이며, 시는 그 경계를 넘어오는 존재다. 황성구 시인은 이를 과장하지 않고 “살며시”라는 단어로 처리함으로써, 시의 본질이 강요가 아니라 스며듦에 있음을 정확히 짚어낸다.
“세월 깊어도 / 종이의 흔적은 아직 따스하여”에서는 시간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다. 종이는 낡고 바래지만, 그 안에 담긴 시혼은 외려 더 따뜻해진다. 이는 물질은 닳아도 정신은 깊어진다는 문학의 본질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특히 ‘따스하여’라는 표현은 단순한 온도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온기까지 포함한다.
끝 연 “한 줄 한 마디마다 / 마음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네”는 이 시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를 집약한다. 시는 문을 부수지 않는다. 두드린다. 그것도 조심스럽게. 이 ‘조심스러움’은 시를 대하는 시인의 윤리이며, 동시에 황성구 시인 자신의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황성구 시인의 생애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그는 기도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틈만 나면 산사를 찾아 자연의 숨결에 자신을 낮추고, 말보다 침묵으로 사유하는 삶을 선택해 왔다. 그러한 삶은 이 시의 결에 그대로 스며 있다. 시 속의 고요, 절제, 그리고 낮은 호흡은 자연 속에서 길러진 그의 정신적 자세를 반영한다.
이 시는 소월을 읽는 시가 아니라, 시를 읽는 인간의 자세를 보여주는 시다. 시 앞에 선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비워 그 향기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황성구 시인의 시는 크게 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 남는다. 그것은 그의 시가 말의 힘이 아니라, 삶의 깊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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