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맑음의 근원에서 피어난 봄 — 청민 박철언 시인의 《봄, 피어오르다》를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맑음의 근원에서 피어난 봄 — 청민 박철언 시인의 《봄, 피어오르다》를 읽다 2026.03.20
맑음의 근원에서 피어난 봄  — 청민 박철언 시인의 《봄, 피어오르다》를 읽다

봄, 피어오르다

시인 青民 박철언

연노랑 봄빛 허리 살랑살랑

언 땅에 따스한 안부 전하니

메마른 가지 끝 앙다문 입 열어

살며시 꽃망울 터지는 소리

톡톡

하늘 표정이 돌변한 진눈깨비에

깨어나려다 움츠러드는 물방울

푸른 신호로 바뀌기만 기다리는 걸까

겁먹고서 가지 끝에서

대롱대롱

봄바람 사르르 물방울 깨워

가지 끝 접은 손 봄볕으로 펴니

연달아 피어나는 꽃들의 웃음 잔치

약속한 듯 모두 소리 지운 채

방긋방긋

맑음의 근원에서 피어난 봄

— 청민 박철언 시인의 《봄, 피어오르다》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 《봄, 피어오르다》 는, 한평생 법조와 정치의 격랑을 건너온 사람의 시라 믿기 어려울 만큼 맑다. 단순한 서정이 아니다. 불필요한 감정의 과장을 걷어내고 가장 연한 언어로 가장 깊은 생의 감각을 드러낸다.

이 시의 힘은 무엇을 더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비워냈느냐에 있다.

첫 연은 봄의 도착을 몸의 감각으로 불러낸다. ‘허리 살랑살랑’이라는 표현은 계절을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 환기하며, ‘언 땅에 따스한 안부 전하니’라는 문장은 자연을 대상이 아닌 교감의 존재로 끌어들인다.

그 결과 가지 끝의 꽃망울은 단순한 개화가 아니라 응답이 된다. 마지막의 ‘톡톡’은 소리의 최소화이면서도 생명의 시작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낸다.

둘째 연에서 시는 잠시 멈춘다. ‘진눈깨비’라는 돌연한 기운 앞에서 ‘깨어나려다 움츠러드는 물방울’은 존재의 망설임을 드러낸다.

‘푸른 신호를 기다리는’ 장면은 자연과 인간의 시간 인식을 교차시키며,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는 생명이 머무는 가장 위태로운 순간을 형상화한다. 이 멈춤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내면의 시간이다.

셋째 연에서 시는 다시 흐른다. ‘봄바람 사르르’라는 완만한 움직임이 접힌 생을 펼치고, ‘연달아 피어나는 웃음 잔치’는 소란 없이 확장된다. ‘소리 지운 채 방긋방긋’이라는 표현에서 이 시의 미학은 완성된다. 생명은 크게 외치지 않는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맑음은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다. 경북고 시절 ‘청맥’이라는 문학동아리를 스스로 세워 시어를 갈고 닦던 시간, 서울법대에 진학한 뒤 고시공부라는 치열한 현실 속에서도 전혜린 선생과 독어문학회에서 내면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던 시간, 그 축적이 오늘의 언어를 만들었다.

치열한 현실과 깊은 사유가 동시에 작동했기에 가능한 맑음이다.

이 시의 핵심은 단순한 서정의 투명함이 아니라, 오래 다져진 내면에서 길어 나온 정화된 언어다. 흔들림을 지나, 멈춤을 견딘 뒤에야 도달하는 맑음이다. 또한, 이 작품은 봄을 노래하면서도 계절의 풍경에 머물지 않는다. 한 인간이 지나온 시간의 결이 가장 고요한 순간에 드러난 장면이다.

박철언 시인의 《봄, 피어오르다》는 작지만 깊다. 덜어내어 더 많이 남기고, 낮추어 더 멀리 가는 시다.

인간이 지나온 시간의 정화된 결과이며, 그 시간이 가장 투명한 순간으로 피어난 장면이다.

하여, 이 시는 읽히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읽은 뒤에 더 오래 남는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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