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국 시인론 ㅡ비우며 건너온 생의 다리, 나누며 깊어진 시의 숨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이희국 시인론 ㅡ비우며 건너온 생의 다리, 나누며 깊어진 시의 숨 2026.03.24
□ 이희국 문몌사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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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국 시인론
ㅡ비우며 건너온 생의 다리, 나누며 깊어진 시의 숨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Ⅰ. 들어가는 말
한 시인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그가 발표한 시 몇 편을 인용하고, 그 안의 비유와 상징을 해석하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 인간이 어떤 시간의 강을 건너왔는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지키며 살아왔는지, 어떤 상처를 품은 채 어떤 빛을 길어 자신의 문장으로 옮겨 놓았는지를 함께 헤아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작품 세계를 말하는 일은 곧 그의 생의 결을 함께 읽는 일이기도 하다. 생을 통과하지 않은 문장은 오래 남기 어렵고, 삶에 뿌리내리지 않은 시는 때로 정교할 수는 있어도 깊어지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희국 시인은 작품과 생애가 서로를 비추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그의 시에는 기교보다 먼저 삶이 있고, 수사보다 먼저 사람의 체온이 있으며, 화려한 장식보다 먼저 오래 견딘 시간의 무늬가 배어 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 먼저 언어가 아니라 한 사람의 태도가 다가온다. 그 태도는 높게 외치지 않으나 낮게 오래 남고, 단정하되 얕지 않으며, 부드럽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이희국 시인의 문학적 이력은 일반적인 문단 경력의 축적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그것은 몇 해에 등단하고 몇 권의 시집을 냈는가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의 문학은 유년기의 고전 체험에서 비롯된 언어 감각, 가난과 결핍의 시간을 통과하며 다져진 내면의 결, 약업과 교육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생로병사의 얼굴들, 그리고 새벽마다 자신을 문학 앞에 세워 온 성실의 시간들이 오랜 층위를 이루며 형성된 것이다.
그는 문학을 전공하지 못한 아쉬움을 겸허하게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문학은 바로 그 비전공의 자리에서 얻어진 더 넓은 인간 이해와 더 구체적인 삶의 체험을 자양분으로 삼아 왔다. 문학이 제도 안에서 배운 지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희국의 삶과 시는 조용히 증언한다.
그의 시는 이론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동시에 삶의 현장에서 사람의 온기를 놓치지 않는다. 이는 매우 귀한 미덕이다. 오늘의 시단이 때로 지나친 난해성과 자기 폐쇄성 속에서 독자와 멀어지고, 예술성의 이름으로 삶의 현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는 경향을 보일 때, 이희국의 시는 다른 자리를 보여 준다. 그는 “좋은 시”를 쓰고자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에게 가닿는 시”를 꿈꾼다. 감동과 공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시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대중 지향이 아니라, 문학의 본령에 대한 신념으로 읽혀야 한다. 문학은 결국 인간을 향한 것이며, 좋은 시는 결국 좋은 사람이 오래 견디어 낸 시간의 다른 이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희국 시인의 생애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문학과 현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전을 듣고, 근현대 시를 읽고 외우며 문학적 토양을 길러 온 그는, 한편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이웃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실천의 삶을 살아냈다.
약사로서 병든 몸을 만졌고, 교육자로서 젊은 세대를 만났으며, 사회인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을 자신의 꿈으로 삼았다. 이러한 생의 실천은 그의 시를 추상적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실제 사람의 숨과 체온이 머무는 언어로 만들었다. 그의 시 속 사랑과 연민, 기다림과 그리움은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체험의 결실이며, 그의 시가 지닌 단정한 감동은 삶으로 검증된 윤리에서 비롯된다.
또한 이희국 시인의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새벽의 시간이다. 그는 바쁜 생업 속에서도 매일 새벽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를 문학의 시간으로 지켜 왔다. 이 고요한 성실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문학을 향한 경건한 자기 헌신이다. 시는 우연한 영감만으로 쓰이지 않는다. 오래 듣고, 오래 기다리고, 오래 자신을 비워내는 사람에게 비로소 온다. 이희국의 시가 급하지 않고 과장되지 않으며, 다정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이유는 이 새벽의 수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시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 그 겸허함이 그의 문장을 더욱 오래 가게 만든다.
본고는 이희국 시인의 삶의 이력과 시 정신, 감성의 근원과 사유의 축, 그리고 작품 세계의 미학적 특질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그의 시가 어떻게 유년기의 문학적 토양 위에서 움트고, 약사로서의 실천적 생애와 결합하며, 나눔과 사랑의 윤리,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 그리고 대중과 함께 호흡하려는 문학적 지향으로 심화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이희국의 시가 단지 한 개인의 서정적 산물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오래된 신뢰와 생의 근원을 끝까지 잊지 않으려는 현대적 양심의 기록임을 밝히고자 한다. 나아가 그의 시가 오늘의 시단에서 왜 다시 주목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의 문학이 왜 “읽히는 시”를 넘어 “남는 시”의 자리에 놓여야 하는지를 함께 논하고자 한다.
Ⅱ. 가운뎃말
- 유년의 토양과 문학의 원형
이희국 시인의 문학은 특정한 시기나 사건에서 돌연히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주 이른 시절부터 조용히 스며들어 형성된 것이다. 그의 유년은 단순한 성장의 시간이 아니라, 문학의 원형이 형성된 결정적 시기였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듣던 구운몽, 옥루몽, 옥단춘전과 같은 고전 서사는 단순한 이야기의 전달을 넘어, 언어의 리듬과 정서의 깊이를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러한 체험은 훗날 시를 쓰는 기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인간을 이해하는 감각, 그리고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남는다.
고전은 단지 오래된 텍스트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고통, 사랑과 이별, 희망과 좌절이 반복되는 구조를 담고 있는 집약된 시간이다. 이희국 시인은 이 구조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과장된 감정이나 인위적인 장치 없이도 인간의 보편적 정서가 흐른다. 이는 문학적 기교의 결과라기보다, 이미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이야기의 감각이 언어로 옮겨진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친가와 외가에 문인이 많았던 환경은 문학을 특별한 재능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했다. 문학은 선택된 소수만의 것이 아니라, 숨 쉬듯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환경은 그로 하여금 문학을 과시의 도구가 아니라, 내면을 지탱하는 힘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가난은 있었지만, 그 가난 속에서도 문학은 결핍되지 않았다. 오히려 결핍 속에서 문학은 더 절실한 의미를 갖게 되었고, 삶을 버티게 하는 정신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이희국 시인의 문학적 성장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중학교 시절 만난 국어교사 안병국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한 사람의 교사가 한 인간의 인생 방향을 바꾼다는 말은 흔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희국에게 있어 이 만남은 단순한 교육적 경험을 넘어선다. 국어와 문학을 평생 사랑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준” 존재로서, 이 교사는 그의 문학적 삶의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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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가는 다리가 놓이고
사람들은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어린 시절 그런 대교 같은 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나의 다리였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시던 부모님
나는 어둑할 때까지 교실에 남아 책을 읽었다
창밖에 눈이 내리던 날
어깨를 감싸는 따뜻한 손,
국어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교무실로, 집으로 데려가주셨다
외진 구석에 피어있던 꽃, 어루만지며
목말까지 태워 주신 사랑은
겨울에서 봄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창밖에는 그날처럼 눈이 내리고
꼬리를 문 차들이 어둠을 밝히며 영종대교를 지나고 있다
바닷물 위에 길이 환하다
-시 ‘다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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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그의 시 《다리》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섬으로 가는 다리’, ‘겨울에서 봄을 이어주는 다리’라는 이미지 속에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문학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통로의 의미가 담겨 있다. 문학은 단절된 현실을 건너게 하는 힘이며, 절망의 자리에서 다른 가능성으로 이어주는 길이다. 이희국 시인에게 문학은 바로 그러한 다리였다. 그리고 그는 그 다리를 건넌 사람으로서, 다시 다른 이들을 건네게 하는 언어를 선택하게 된다.
유년기의 이러한 경험은 그의 시 세계 전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의 시에는 언제나 “연결”의 감각이 살아 있다. 사람과 사람, 과거와 현재, 상처와 회복 사이를 이어 주는 정서가 흐른다. 이는 단순한 주제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단절을 강조하지 않고, 이어짐을 모색한다. 갈라진 것을 다시 잇고, 멀어진 것을 다시 불러들이는 시선이 그의 문학의 중심을 이룬다.
또한 유년기의 가난과 이동의 경험은 그의 내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초등학교를 여러 번 전학하며 안정된 환경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경험은, 한편으로는 불안과 결핍을 안겨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삶의 풍경을 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특정한 장소나 계층에 고정되지 않고, 보다 넓은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의 시가 특정한 집단의 언어로 제한되지 않고, 다양한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희국 시인의 유년은 단순한 출발점이 아니라, 그의 문학 전체를 지탱하는 원형적 기반이다. 고전의 서사, 문학적 환경, 한 교사의 영향, 그리고 가난 속에서의 삶의 체험이 서로 얽히며 하나의 내면 구조를 형성했고, 그 구조는 이후 그의 시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주된다.
이처럼 그의 문학은 특정 시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축적된 시간의 결 위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이희국의 시는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이 언어로 천천히 번져 나온 결과라 할 수 있다.
- 삶의 현장에서 이끌어 올린 시
이희국 시인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업과 삶의 현장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문학을 위해 세상을 등진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문학을 길러 낸 사람이다.
약사로서의 오랜 세월, 대학 강의 현장에서의 경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의 시를 형성한 가장 중요한 토양이다. 이 점에서 그의 문학은 책상 위에서 만들어진 관념적 산물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체득된 감각과 사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약국은 단순한 직업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이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자리다. 병을 안고 찾아오는 사람들, 치료의 희망과 불안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들, 삶의 마지막 국면을 맞이한 이들의 가족들까지, 약국은 인간 존재의 취약성이 응축된 장소다. 이희국 시인은 그 현장에서 수십 년을 보냈다. 그는 단순히 약을 건네는 일을 넘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표정을 읽고,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함께 견디는 시간을 살아왔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시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의 시에는 추상적 고통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결이 살아 있다. 슬픔은 개념으로 등장하지 않고 얼굴을 가진 채 나타나며, 고통은 서술이 아니라 체온으로 전해진다. 이는 단순한 묘사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이희국의 시는 인간을 하나의 주제가 아니라, 함께 숨 쉬는 존재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설명보다 공감을, 판단보다 동행을 지향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가 약사로서 수많은 사람의 생로병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탄생과 성장, 병과 회복,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반복적으로 목격한 사람은 삶을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 그에게 삶은 언제나 복합적이며, 동시에 연약하고도 존엄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시 속에서 과장되지 않은 품위로 드러난다. 그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그것을 냉정하게 대상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머물며, 그 고통이 가진 의미를 조용히 받아들인다.
이희국 시인의 또 다른 특징은 삶의 실천이 문학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단순히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다. 부모에게 집을 마련해 드리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으며, 실제로 그것을 이루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의 시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의 시에서 사랑은 선언이 아니라 경험이며, 나눔은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윤리적 깊이를 지닌다. 그러나 그 윤리는 교훈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이는 그가 이미 삶에서 그것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문학은 때로 윤리를 말하지만, 그 윤리가 삶과 분리되어 있을 때 공허해진다.
이희국의 시는 그 공허함과 거리가 멀다. 그의 문장은 삶의 근거를 지니고 있으며, 그 근거가 독자에게 신뢰로 다가온다.
또한 그는 약사라는 직업을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천업”으로 받아들였다. 이 인식은 그의 삶과 문학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축이다. 천업이라는 개념에는 선택을 넘어선 책임과 사명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그 만남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삶의 본질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다시 시로 돌아와, 인간을 향한 깊은 이해와 따뜻한 시선으로 재구성된다.
이희국 시인의 문학은 결국 “현장에서 길어 올린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언어는 거칠지 않다. 오히려 오랜 시간 속에서 다듬어진 부드러운 결을 지닌다. 이는 그가 삶을 서두르지 않고,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으며, 경험을 충분히 숙성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빠르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축적과 침전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희국의 시는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삶을 따로 살고 시를 따로 쓰지 않는다. 삶이 곧 시가 되고, 시가 다시 삶을 비추는 구조 속에서 그의 문학은 형성된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희국 시인의 문학은 “사람을 오래 바라본 시간의 언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그의 시는 오늘의 독자에게 더욱 깊은 울림을 전한다.
- 새벽의 문학과 시 정신의 핵심
이희국 시인의 문학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는 ‘시간을 대하는 태도’이다. 특히 매일 새벽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를 문학의 시간으로 정해 지켜온 그의 습관은 단순한 생활 규칙이 아니라, 그의 시 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바쁜 생업과 사회적 역할 속에서도 문학을 위해 하루의 가장 맑은 시간을 떼어낸다는 것은, 문학을 취미가 아니라 삶의 중심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새벽은 소리가 가장 적고, 생각이 가장 맑아지는 시간이다. 외부의 자극이 줄어든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내면의 숨을 들을 수 있다. 이희국 시인은 바로 그 시간에 자신을 문학 앞에 세운다.
이는 단순히 글을 쓰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다시 채우는 시간이다. 그는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언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그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조용히 가다듬는다. 이 점에서 그의 문학은 창작 이전에 하나의 수행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문학의 시간”은 결과를 생산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의 시간이며, 마주침의 시간이다. 그는 내일 새벽 어떤 글과 어떤 발상을 만날지 기대하며 잠든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시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를 ‘만난다’고 여긴다. 이는 시를 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이러한 태도는 문학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게 하며, 언어를 더 겸허하게 다루게 만든다.
이희국 시인의 시 정신은 바로 이 겸허함에서 비롯된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시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 이는 오늘날 문학 환경에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시는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소비되며, 작가는 자신의 개성과 감각을 강조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이희국의 문학은 그와 다른 방향을 지닌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을 확장하기보다, 자신을 비워내고, 그 빈자리에 삶의 숨결과 타인의 이야기가 머물도록 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시에 자연스러운 절제와 깊이를 부여한다. 그의 문장은 과장되지 않고, 감정을 억지로 끌어올리지 않으며, 독자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머물며,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느끼게 한다. 이는 언어를 믿기보다 침묵을 신뢰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의 시에는 말해지지 않은 여백이 있으며, 그 여백 속에서 독자의 사유가 이어진다.
또한 그의 시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이라는 정서가 중심을 이룬다. 그는 시를 통해 상념을 비우고,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으며,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린다. 이 기다림은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삶이 주는 속도에 맞추기보다, 자신만의 호흡으로 시간을 견딘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시를 더욱 오래 남게 만든다.
이희국 시인의 문학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특징은 ‘지속성’이다. 그는 하루 이틀의 열정으로 시를 쓰지 않는다.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시를 읽고, 외우고, 쓰며, 문학을 자신의 삶 속에 스며들게 했다. 이 지속성은 단순한 성실을 넘어선다. 그것은 문학을 통해 자신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이며, 동시에 문학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준다는 신뢰의 표현이다.
이러한 지속성은 그의 시를 안정된 결로 이끈다. 그의 문장은 급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이 지나온 시간만큼의 무게를 지닌다. 이는 단기간에 얻을 수 있는 성과가 아니다. 오랜 시간의 반복과 축적,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깊이다.
이희국 시인의 문학은 “시간을 견디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시를 통해 순간의 감정을 기록하기보다, 시간 속에서 숙성된 마음을 남긴다. 그의 시는 빠르게 읽히지 않지만 오래 남고, 강하게 주장하지 않지만 깊이 스며든다.
이러한 문학적 태도는 오늘날 더욱 의미를 가진다.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 그는 느림을 선택하고, 소음 속에서 침묵을 선택하며, 과잉 속에서 절제를 선택한다. 그리고 바로 그 선택이 그의 시를 특별하게 만든다.
이희국의 시는 결국 “기다림으로 완성된 언어”이며, 그 언어는 읽는 이의 마음에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 이희국 시의 미학적 특질과 문학적 지향
이희국 시인의 문학을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요소는 ‘감동의 윤리’와 ‘공감의 확장성’이다. 그는 스스로를 “감동을 추구하는 절대가치에 의존하는 시인”이라 말한다. 이 고백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시가 지향하는 본질을 정확히 드러내는 문학적 선언이다. 오늘의 시단이 종종 형식적 실험과 언어의 난해함을 통해 예술성을 확보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 이희국의 시는 정반대의 자리에서 인간의 마음에 가닿는 언어를 모색한다.
그의 시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다. 쉽게 읽히되 쉽게 잊히지 않는 문장, 평이한 어휘 속에 오래 머무는 여운이 그의 시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는 단순한 표현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다. 그는 시를 통해 독자를 시험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와 함께 호흡하려 한다. 시가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느껴져야 할 공간이라는 인식이 그의 시 전체를 관통한다.
이러한 지향은 그가 오랫동안 애독해 온 시인들—정지용, 김소월, 박인환—의 계보와도 맞닿아 있다. 이들의 시는 각각 다른 미학을 지니고 있으나, 공통적으로 인간의 정서에 깊이 스며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희국 시인의 시 역시 이 전통을 계승하면서, 현대적 삶의 맥락 속에서 새롭게 변주된다. 그의 언어는 고전적 정서를 품고 있으면서도, 오늘의 삶과 괴리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오랜 독서와 내면화 과정을 거쳐 형성된 자신만의 문학적 결이다.
그의 시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품위의 미학’이다. 그는 고통을 과장하지 않으며, 슬픔을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조용히 견디고, 그 견딤 속에서 언어를 길어 올린다. 그의 시 《아버지》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시는 눈물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눈물에 이르게 한다. 이는 감정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고도의 미학적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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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언제나 돌아서 있었다
명문가의 고학력 아버지
역사의 회오리에 청운의 꿈 부서지고
하수들 설치는 꼴 보기 싫어 시대의 뒤편만 찾아다녔다
등록금 없어 어머니가 사방으로 뛰어다닐 때,
배워봐야 쓸모없는 책 다 태워버린다고 소리치고 나가던 아버지
멀리서 작은 울음이 들려오곤 했다
쌀독이 바닥을 드러내면
친구 같은 라디오를 들고 나갔고
한계까지 볼륨을 올린 듯 라디오가 울었다
골목이 떠나가도록 울리던 광복20년 연속극
여보시오 백범 제발 나를 도와주시오···성우 구민의 목소리
다섯 식구가 귀로 먹는 밥이었다
독립문표 메리아스 둑 방 아래 단칸방에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백열등이 불안으로 깜빡거리고
아버님 이름으로 아들이 첫 집을 사자,
35년 만에 가장 화난 얼굴로 뛰어오신 아버지
너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무슨 억한 마음이냐!
아니요, 아버지니까요
부모님 집 사드리는 게 소원이었다고
아버지와 얼굴을 맞대고 한참이나 울었는데
15년이 지나 영정으로 마주한 아버지
활짝 웃고 계신다.
ㅡ시 《아버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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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천만 원짜리 시”라는 일화는 그의 문학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편의 시가 누군가에게 금전적 가치로 환산될 수 없을 만큼의 감동을 주었다는 사실은, 그 시가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희국의 시는 독자에게 ‘읽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살아지는’ 지점까지 도달한다. 그것이 그의 시가 지닌 가장 큰 힘이다.
또한 그의 문학은 윤리적 지향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윤리는 교훈적이거나 설교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독자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한 인간의 삶을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그의 시 속에는 부모에 대한 효, 이웃에 대한 배려, 삶에 대한 성실함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이러한 윤리는 강요되지 않기에 더 깊이 전달되며, 독자의 내면에서 자발적인 울림으로 작용한다.
이희국 시인의 또 다른 특징은 ‘비움의 미학’이다. 그는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쌓기보다 내려놓기를 선택한다. 이는 단순한 동양적 사유의 차용이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 체득된 태도다. 그는 물질적 성취를 경험했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문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문학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을 비우며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되려 한다. 이 비움의 태도는 그의 시를 더욱 맑고 투명하게 만든다.
또한 그는 현대 문학의 흐름을 존중하면서도, 시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에 대해 조심스럽게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보수적 시각이 아니라, 문학의 본질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가 지나치게 자기 내부로 침잠할 때, 그것은 독자와의 연결을 잃을 위험이 있다. 이희국은 이 지점을 경계하며, 시가 다시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이희국 시인의 문학은 “사람에게 가닿는 시”를 향한 지속적인 모색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화려한 실험이나 과도한 장식보다, 오래 남는 울림을 선택한다. 그의 시는 빠르게 소비되지 않으며, 읽는 이의 삶 속에서 천천히 번져 간다.
이러한 문학적 지향은 오늘의 시단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시가 점점 더 개인화되고 난해해지는 경향 속에서, 이희국의 시는 다시금 문학의 본질을 환기시킨다.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깊은 마음의 형식이라는 사실을.
Ⅲ. 맺음말
ㅡ비워서 남기고, 나누어 더 깊어진 시의 자리
이희국 시인의 문학은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것은 특정한 사조나 형식으로 묶이기보다,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의 결 속에서 천천히 형성된 총체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의 삶을 이해하는 일이며, 그의 삶을 읽는다는 것은 곧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비우고, 또 어떻게 타인을 향해 나누며 살아왔는지를 함께 헤아리는 일이다.
그의 문학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오래 남는다. 그것은 언어의 힘이라기보다 삶의 힘에 가깝다. 이희국의 시는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낮춘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낮아짐 속에서 타인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과 기쁨을 함께 견디는 태도를 보여 준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시를 단순한 서정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신뢰의 기록으로 만든다.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희국 시인의 문학은 크게 세 가지 축 위에서 형성된다.
첫째는 유년기의 문학적 토양이다. 고전 서사와 문학적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감각은 그의 시에 깊은 정서적 기반을 제공한다.
둘째는 삶의 현장에서 얻어진 체험이다. 약사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한 사회인의 자리에서 만난 수많은 인간의 얼굴들은 그의 시를 현실과 단절되지 않게 만든다.
셋째는 새벽의 시간으로 상징되는 문학적 성실이다. 오랜 시간 반복된 자기 수련과 기다림은 그의 시에 안정된 깊이와 절제를 부여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외려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그의 문학을 유기적으로 형성한다. 유년의 감수성은 삶의 현장에서 검증되고, 삶의 체험은 새벽의 사유 속에서 언어로 정제된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문장은 다시 독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 또 다른 의미를 생성한다. 이 순환 구조야말로 이희국 문학의 본질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의 시가 지닌 윤리적 깊이다. 그는 시를 통해 무엇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문장에는 이미 하나의 삶의 태도가 스며 있다. 부모를 향한 마음, 이웃을 향한 배려,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는 의지는 그의 시를 읽는 이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이는 문학이 도덕을 설파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지점이다.
또한 이희국의 시는 오늘의 문학 환경 속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시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를 향해 쓰이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그의 시는 이 질문에 대해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태도로 답한다. 그것은 “사람에게 가닿는 시”를 향한 지속적인 지향이다. 이는 단순한 대중성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의 근본적 역할에 대한 성찰이다.
오늘의 시대는 빠르고 복잡하다. 관계는 얕아지고, 감정은 쉽게 소비되며, 언어는 점점 더 가벼워진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이희국의 시는 느림과 깊이, 그리고 머무름의 가치를 다시 일깨운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쉽게 판단하지 않으며, 오래 바라본다. 그리고 그 바라봄 속에서 얻어진 언어를 조용히 건넨다.
그의 시는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 들린다.
그의 문장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희국 시인의 문학은 하나의 다리와 같다.
삶과 문학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다리.
그 다리는 견고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래 버틴다.
비워서 남기고,
나누어 더 깊어진 그의 시는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 위에 조용히 놓인다.
그 위를 건너는 사람들은
비로소 알게 된다.
좋은 시란
잘 쓰인 문장이 아니라,
오래 살아낸 삶이
천천히 번져 나온 자리라는 것을.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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