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광일 시인의 시 《봄 엽서 21》 ㅡ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삶 — 갈대에 비친 한 인간의 품격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주광일 시인의 시 《봄 엽서 21》 ㅡ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삶 — 갈대에 비친 한 인간의 품격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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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엽서 21
시인 주광일
순천만 갈대밭에 갔었습니다. 황금빛 노란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문득 나 어릴적 엄마 모습이 보였습니다.
갈대는 바람부는 쪽으로 온몸을 굽히면서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한 모습의 갈대는 아무 생각 없이 바람결따라 굽혔다 일어섰다를 되풀이할 뿐, 바람이 저 먼 수평선 너머로 가버릴 때 까지, 결코 꺽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바람춤을 추는 갈대 앞에서, 나는 나 어릴적 엄마 앞에서 처럼 천진난만한 소년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2026.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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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삶
— 갈대에 비친 한 인간의 품격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주광일 시인의 《봄 엽서 21》은 짧은 산문형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그 내부에는 한 인간의 생애가 응축되어 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자연 묘사로 시작하지만, 곧 개인의 기억과 삶의 태도로 깊어지며, 마침내 존재의 윤리를 조용히 드러낸다. 이 시를 읽는 일은 곧 한 평생을 돌아보는 일과도 같다.
첫 문장 “순천만 갈대밭에 갔었습니다”는 매우 담담하다. 그러나 이 담백함이야말로 이 시의 미덕이다. 과장되지 않은 문장은 독자를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이어지는 “황금빛 노란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습니다”는 시각적 이미지를 넓게 펼치며, 갈대밭을 단순한 식물이 아닌 ‘움직이는 생명’으로 환기한다. 여기서 갈대는 이미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이후 시선은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한다. “문득 나 어릴 적 엄마 모습이 보였습니다”라는 구절은 이 시의 정서적 중심이다. 갈대라는 자연은 곧 어머니라는 존재로 전이된다. 이는 단순한 연상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 온 근원에 대한 회귀다. 갈대의 흔들림 속에서 어머니를 본다는 것은, 변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존재를 발견하는 일이다.
핵심은 갈대의 태도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난다. “바람 부는 쪽으로 온몸을 굽히면서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은 이 시의 윤리적 축이다. 흔히 갈대는 나약함의 상징으로 읽히지만, 이 시에서는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굽힌다는 것은 굴복이 아니라 순응이며, 그 순응은 생존의 지혜이자 품격이다. “결코 꺾이지 않고”라는 표현은 그 지점을 분명히 한다. 흔들림은 허용되지만, 파괴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주광일 시인의 삶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법조인과 공직자로서 청백리의 길을 걸어온 그의 이력은, 이 갈대의 이미지와 깊이 맞닿아 있다. 그는 시대의 바람 속에서 때로는 몸을 낮추었을지라도, 본질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현실과 단절되지 않는 태도. 바로 그 균형이 이 시의 핵심이자, 그의 삶의 방식이다.
마지막 장면은 다시 정서로 회귀한다. “나는 나 어릴 적 엄마 앞에서처럼 천진난만한 소년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는 설명을 멈추고, 감정으로 남는다. 갈대 앞에서 소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경험이다. 그것은 회상이 아니라 회복이다.
이 작품의 미덕은 무엇보다 ‘힘을 빼는 데서 오는 힘’에 있다. 격렬한 주장도, 과장된 감정도 없다. 그러나 그 절제 속에서 더 깊은 울림이 발생한다. 마치 오랜 세월 단련된 인품이 큰 소리 없이도 신뢰를 주듯, 이 시 또한 조용히 읽히면서 오래 남는다.
이 시는 갈대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삶, 낮추되 무너지지 않는 태도, 그리고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존재의 방식. 주광일 시인은 이 모든 것을 단 몇 개의 문장 속에 담아낸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갈대밭을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갈대 사이 어딘가에, 한 인간의 곧은 삶이 조용히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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