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유재영 시인의 시 《느티나무 그 저녁은》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유재영 시인의 시 《느티나무 그 저녁은》 2026.04.03
유재영 시인의 시 《느티나무 그 저녁은》

느티나무 그 저녁은

시인 유재영

물 받은 놋대야에 맨살로 온 가랑잎

왠지 자꾸 허전한 헛간 같은 어스름

만나고 뒤돌아가는 반백의 시간이여

느티나무 저녁은 아무래도 그렇다

섶다리 건너와서 동부꽃 피는 마을

잘새 떼 자잘대듯이 소반 앞에 모인 가족

뒷개울 건너가는 허박지 허연 물소리며

살구나무 큰 그림자 우두커니 지키고 선

구름 낀 달밤이던가 느티나무 그 저녁은,

느티나무 아래, 저녁이 오래 머무는 방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시인의 언어는 대개 그가 걸어온 시간의 결을 닮는다.

1973년 박목월의 추천으로 시단에 나서고, 이태극으로부터 시조를 사사한 유재영 시인의 이력은 그의 시 세계가 단순한 서정에 머물지 않는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전통의 호흡과 현대의 감각이 함께 스며든 그의 언어는 늘 절제된 깊이를 지향해 왔다.

시 《느티나무 그 저녁은,》 역시 그러한 축적의 결과로 읽힌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것은 ‘사물의 결을 만지는 방식’이다.

“물 받은 놋대야에 맨살로 온 가랑잎”이라는 첫 구절은 시조적 압축미와 현대시적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박목월 계열의 자연 친화적 서정이 은근히 배어 있으면서도, 그 표현은 보다 촉각적이고 물성에 밀착해 있다. 놋대야의 차가움과 가랑잎의 얇은 생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생의 표면을 다시 만지는 행위로 확장된다.

이어지는 “허전한 헛간 같은 어스름”에서는 이태극에게서 이어받은 시조적 공간 감각이 드러난다. 공간은 단순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담는다.

헛간의 공허는 결핍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의 잔향이며, 어스름은 그 잔향을 완전히 지우지 않는 빛이다.

이때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의 배치를 통해 감정을 스스로 떠오르게 한다.

“만나고 뒤돌아가는 반백의 시간이여”라는 구절에 이르면, 유재영 시인 시 세계의 본령이 드러난다. 그의 시집 《한 방울의 피》나 《지상의 중심이 되어》에서 일관되게 확인되는 것은, 삶을 직선이 아니라 되돌아봄의 구조로 이해하는 태도다.

여기서 ‘반백’은 단순한 연령이 아니라, 시간의 무게가 내면에 스며든 상태를 의미한다.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시간은 흐르기보다 머문다.

중반부의 풍경은 공동체의 기억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섶다리 건너와서 동부꽃 피는 마을”은 그의 시집 《구름 농사》에서 보여준 농경적 상상력의 연장선에 있다.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며, “잘새 떼 자잘대듯이 소반 앞에 모인 가족”은 그 삶이 만들어낸 관계의 온도를 소리로 환기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한 시대의 생활 방식이 언어로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다.

특히 “허박지 허연 물소리”는 유재영 시인 시 특유의 감각적 전이를 잘 보여준다. 시조적 전통에서 길러진 음률감이 현대시의 이미지와 결합되면서, 소리는 색을 얻고, 풍경은 기억의 층위를 획득한다.

이러한 방식은 그의 시조집 《햇빛 시간》이나 《달항아리 어머니》에서 확인되는 절제된 울림과도 맞닿아 있다.

종결부의 “살구나무 큰 그림자 우두커니 지키고 선” 장면은 이 시의 정신적 중심이다. 느티나무와 살구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시간을 견디며 서 있는 존재, 곧 인간의 삶을 말없이 받아들여 온 증인이다.

“구름 낀 달밤이던가”라는 반문은 기억의 불확실성을 드러내지만, 그 불확실성은 외려 정서를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기억은 정확해서가 아니라, 흐릿하기에 더 오래 남는다.

유재영 시인의 시는 화려하지 않다.

그 절제 속에는 오랜 수련의 깊이가 배어 있다.

추천으로 문단에 들어섰다는 사실은 출발일 뿐이며, 그 이후의 시간은 스스로 다져온 것이다. 시와 시조를 함께 익힌 그의 이력은 언어를 덜어내는 법과 남겨두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게 했다.

하여,

그의 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한다. 느티나무 아래의 저녁은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그 저녁을 지켜본 언어는 아직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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