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김선영 시인의 시 《그리움의 식물성》 — 존재의 내면에 뿌리내린 그리움의 형상학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김선영 시인의 시 《그리움의 식물성》 — 존재의 내면에 뿌리내린 그리움의 형상학 2026.04.11
김선영 시인의 시 《그리움의 식물성》 — 존재의 내면에 뿌리내린 그리움의 형상학

그리움의 식물성

시인 김선영

지워도

지워도

생기는 초승달같이

반달에서 더 자란

만월같이

만월로 둥실

걸린

얼굴같이

사람들은 그리움 공간을

가슴에 걸어 두지요

사랑은

잊으려 하여도

드러나고 자라나는 무서운

식물성이 있어요

그래서 오늘밤 만월이에요

김선영 시인의 시 《그리움의 식물성》

— 존재의 내면에 뿌리내린 그리움의 형상학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지워낸 자리에서 다시 돋아나는 것, 그 반복의 미세한 떨림이 이 시의 중심을 이룬다. 단순한 감정의 회귀가 아니다. 존재의 내부에 이미 뿌리내린 무엇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라나는 과정이다.

김선영 시인의 《그리움의 식물성》은 그리움을 ‘남겨진 감정’이 아니라 ‘자라나는 생명’으로 전환시킨다. 이 전환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인식의 핵심이며, 동시에 이 시를 단순한 서정의 차원에서 존재론적 깊이로 끌어올리는 장치다.

“지워도 / 지워도 / 생기는 초승달같이”라는 첫 구절은 반복을 통해 시간의 축적을 드러낸다. 여기서 ‘지운다’는 행위는 단순한 망각의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제거, 혹은 감정의 절제를 의미한다. 그 시도는 실패로 귀결된다. 초승달은 다시 떠오른다. 이때 달은 외부의 자연물이 아니라 내면의 형상이다. 이어 “반달에서 더 자란 / 만월같이”로 확장되는 이미지는, 감정이 억제될수록 더 충만해지는 역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과정은 미당 서정주의 시 세계에서 자주 발견되는 ‘자연의 이미지와 인간 감정의 동형성’을 떠올리게 한다.

허나, 김선영은 이를 모방하지 않는다. 외려 그 전통을 자신의 내면적 사유로 재구성하여, 보다 절제된 언어 속에 밀도 있게 담아낸다.

“만월로 둥실 / 걸린 / 얼굴같이”에서 달은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환치된다. 이때 ‘걸린’이라는 동사는 중요하다. 달이 하늘에 걸리듯, 그리움은 가슴에 걸린다. 이 ‘걸림’은 단순한 부착이 아니라, 제거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어지는 “사람들은 그리움 공간을 / 가슴에 걸어 두지요”는 개인의 감정을 보편의 차원으로 확장시키며, 그리움을 인간 존재의 필연적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리움은 선택이 아니라 구조다.

마지막 연에서 시는 결정적인 전환을 이룬다. “사랑은 / 잊으려 하여도 / 드러나고 자라나는 무서운 / 식물성이 있어요.” 여기서 ‘식물성’이라는 개념은 이 시의 제목이자 핵심 사유다. 식물은 스스로 빛을 향해 자라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방향을 잃지 않는다. 그리움 역시 그러하다. 억누르려 할수록 더 깊이 뿌리내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줄기를 뻗는다. ‘무서운’이라는 형용사는 바로 이 자생성과 불가항력성에서 비롯된다. 감정이 아니라 생명으로서의 사랑, 그것이 이 시가 도달한 지점이다.

이 작품이 그리스의 ‘폴리스매거지노’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 시는 특정 문화의 정서에 머무르지 않는다. 달과 식물이라는 보편적 상징을 통해, 인간 내면의 공통된 구조를 건드린다. 언어는 쉽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사유의 깊이를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스며들기 위한 선택이다. 이는 오랜 시간 문단에서 축적된 내공이 아니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김선영 시인은 한평생 대학 강단에서 문학을 가르친 학자이면서 동시에 시인으로 살아왔다. 이 이중의 정체성은 그의 시에 독특한 긴장을 부여한다. 학자의 사유는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고, 시인의 감각은 그것을 살아 있는 이미지로 환원시킨다. 그 결과 그의 시는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얕지 않다. 쉬운 언어로 깊은 곳을 건드리는 힘, 그것이 김선영 시의 본령이다.

시인은 시인이다.

김선영 시인은 사유하는 시인이다.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이 어떤 구조로 존재하는지를 끝까지 응시한다.

《그리움의 식물성》은 그 응시의 결과물이다. 지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울수록 자라나는 것. 그리움은 그렇게 인간 안에서 스스로를 완성해 간다.

오늘밤, 그 내면의 하늘에 만월이 뜬다.

ㅡ 청람 김왕식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