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함께 걸은 봄날, 홀로 건너갈 길의 품격 ― 주광일 시인의《봄 엽서 35》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함께 걸은 봄날, 홀로 건너갈 길의 품격 ― 주광일 시인의《봄 엽서 35》 2026.04.17
함께 걸은 봄날, 홀로 건너갈 길의 품격 ― 주광일 시인의《봄 엽서 35》

봄 엽서 35

시인 주광일

어제는 대학동기생 8명과 함께 서울대공원 울타리 밖 순환도로를 걸었습니다. 두시간반 가량 걸었으니, 아마도 만보는 넘었겠지요. 언젠가 의사는 나에게 하루 7,500보 이상은 걷지 말라고 권유한 적이 있는데, 봄날에 어울린 친구 덕에 힘든지 모르고 걸었지요.

그런데 요즈음은 평평한 길을 걷는 것이 고작이지요. 5년 전 까지만 해도 산벗들과 함께 청계산의 제2 매봉(363.3 미터)을 올라가곤 했었는데, 요즈음엔 동행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가는 길도 어차피 각자 혼자 갈 것이니, 나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렵니다.

2026.4.16

□ 주광일 시인과 사모님

함께 걸은 봄날, 홀로 건너갈 길의 품격

― 주광일 시인의《봄 엽서 35》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사람의 생애가 단순한 직업의 이력으로 환원되지 않을 때, 그 언어는 자연히 결을 달리한다. 법조인으로, 공직자로 살아오며 破邪顯正의 길을 지켜온 한 인간. 그리고 몇 해 동안 광화문 거리에서 태극기를 들며 시대를 향해 자신의 신념을 몸으로 세워온 애국의 시간.

이 시는 그러한 삶을 지나온 80대 시인의 발걸음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고요하게 보여준다.

“대학동기생 8명과 함께”라는 첫 문장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 서울법대라는 치열한 사유의 공간을 함께 통과했던 이들,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의 중심을 떠받쳐왔던 이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여 걷는다. 그것은 한 시절의 연대가 아니라, 한 생의 무게가 나란히 놓이는 순간이다. 서울대공원 울타리 밖 순환도로를 걷는다는 설정 또한 상징적이다. 중심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이들이 이제는 그 바깥을 따라 천천히 도는 시간, 삶의 궤도를 돌아보는 노년의 자리다.

“두시간반 가량… 만보는 넘었겠지요.” 의사의 권고를 넘어선 걸음이지만, 그것은 무리한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봄날과 동행이 만들어낸 생의 온기다. 이들에게 걷기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을 다시 확인하는 의식과도 같다. 법과 정의, 국가와 공동체를 향해 치열하게 걸어왔던 삶이 이제는 친구와 함께하는 평온한 발걸음으로 이어진다.

시의 흐름은 점차 낮아지고, 사색은 깊어진다. “요즈음은 평평한 길을 걷는 것이 고작이지요.” 이 문장은 단순한 신체적 변화의 고백이 아니다. 더 이상 높은 곳을 향해 오르지 않아도 되는 삶, 아니 오르기보다 넘어지지 않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한때 청계산 제2 매봉을 함께 오르던 산벗들이 있었으나, 이제는 동행조차 쉽지 않다. 함께의 시간은 점차 줄어들고, 각자의 길이 더욱 선명해진다.

이 시의 핵심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가는 길도 어차피 각자 혼자 갈 것이니.”

이 진술은 냉정하지 않다. 외려 깊은 수용이다. 평생 정의를 세우며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온 이가, 이제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고독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렵니다”라는 마무리는 체념이 아니라, 삶을 다 살아낸 이만이 도달할 수 있는 평정의 언어다.

주광일 시인의 시는 쉽다. 그러나 그 쉬움은 결코 가벼움이 아니다. 법조인의 이성, 공직자의 책임, 애국의 실천, 그리고 노년의 사색이 한데 스며들어, 과장 없이도 깊은 울림을 만든다. 특히 이 작품은 ‘함께 걷는 봄날’과 ‘홀로 건너갈 마지막 길’을 한 장면 안에 겹쳐 놓음으로써, 인간의 삶 전체를 조용히 압축해낸다.

함께 걸었던 시간은 따뜻하게 남고, 결국 건너가야 할 길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 시는 그 두 사실을 부드럽게 겹쳐 놓으며 말한다. 삶은 끝내 혼자이지만, 그 혼자에 이르기까지의 동행이 있었기에, 그 길은 결코 쓸쓸하지만은 않다고.

ㅡ 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