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언 시인의 시 《비어간다는 것》 ㅡ비어 있는 자리에서 더 또렷해지는 삶의 무게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박철언 시인의 시 《비어간다는 것》 ㅡ비어 있는 자리에서 더 또렷해지는 삶의 무게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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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간다는 것
시인 청민 박철언
바람의 젖은 눈빛이 앉았다 간
빈 의자 빈 정수리 빈 세월
아득히 뻗어가는 상실의 뿌리
빈 의자의 체온은
달빛이 은은하게 데워주고
빈 정수리의 쓸쓸한 표정은
햇살이 밝게 위로해 주는데
이승 떠난 빈 세월의 기억 몇 다발은
누가 그 시절의 노래로 불러줄끼
주변이 헐겁게 비어갈지라도
빈자리의 회오리가 휘감더라도
휘청이지 말아요 꿋꿋한 그대
비어가는 어떤 하루를 맞더라도
뼈대까지 생기 단단히 채우길
싱싱한 푸른빛 발자국 맘껏 남기길
비어가는 것들 하나둘 늘어나면
어디에도 마음 둘 데 없어
해 질 녘 갈대처럼 외로워지지만
그런 게 우리네 인생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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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는 자리에서 더 또렷해지는 삶의 무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의자는 한 사람의 생을 기억하는 가장 낮은 기록이다.
누군가 앉았다 떠난 자리에는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이 있다. 체온이 아니라 태도, 형체가 아니라 살아온 방식이다. 이 시를 읽는 동안, 비어 있는 것들이 외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는 비어감을 노래하면서도 결코 허무로 기울지 않는다.
그의 언어에는 한평생을 버텨온 균형이 배어 있다. 법조인으로서 옳고 그름의 경계 위에 서 있었던 시간, 공직자로서 공적인 책임을 끝까지 감당해 온 무게, 그리고 이제는 변호사로서 이름 없는 이들의 억울함을 기꺼이 대신 짊어지는 삶. 그 모든 시간이 이 시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분명하게 스며 있다.
“빈 의자”는 단순한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떠난 자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증언하는 자리다. 비어 있는 만큼 더 또렷해지는 흔적. 그가 지나온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외려 비어 있음 속에서 더 깊이 새겨진다.
이 시에서 위로는 결코 소란스럽지 않다.
달빛이 체온을 대신하고, 햇살이 표정을 감싸 안는 장면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자리까지 이어지는 또 다른 돌봄의 방식이다.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를 오래 실천해 온 이의 태도와 닮아 있다. 드러내지 않되 끝내 놓지 않는 마음. 그의 삶이 그러했듯, 이 시 또한 조용히 곁에 머문다.
특히 “누가 그 시절의 노래로 불러줄끼”라는 물음에는, 한 생을 다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울림이 있다. 그것은 회한이 아니라, 남겨진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살아온 날들을 후회로 흩어버리지 않고, 하나의 노래로 남기려는 의지. 이 점에서 그의 시는 삶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다시 살아내는 방식이 된다.
후반부에 이르면 시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비어감 앞에서도 휘청이지 말라는 당부는, 단순한 격려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수많은 흔들림을 통과해 온 사람이 건네는 조용한 증언이다. 법과 제도의 세계에서 수없이 마주했을 인간의 사연들, 그 속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인간에 대한 믿음이 이 한 문장에 응축되어 있다.
그리고 “뼈대까지 생기 단단히 채우길”이라는 구절에서, 그의 삶의 철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겉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속을 세우는 삶. 가진 것보다 남기는 것을 더 깊이 생각하는 태도. 그것은 무료변론을 통해 소시민의 삶에 기꺼이 손을 내미는 그의 현재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마지막의 갈대는 이 시의 결론이다.
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존재. 외롭되 무너지지 않는 자세. 그것은 자연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 평생 지켜온 삶의 형식이다.
이 시를 읽고 나면, 비어간다는 말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비어감은 잃어버림이 아니라, 오래 살아낸 것들이 남기는 깊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 위에, 여전히 따뜻한 숨결 하나가 남아 있다.
□
빈 자리의 등불에게
비워 두었기에
더 오래 밝아지는 자리가 있다
말보다 먼저
살아온 날들이 앉아 있는 자리
법의 저울 위에서
흔들림을 견디던 손끝이
이제는 이름 없는 이들의 어깨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남기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남겨진 것은
단단한 마음 하나
바람이 지나가도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그대의 하루는
비어가면서도
더 깊이 채워진다
세상은 묻지 않으나
이미 듣고 있다
그대가 남긴 것은
결코 비어 있지 않다는 것을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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