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바다를 접어 올린 언어 ― 김선영 시인에게 ㅡ 청람 김왕식

바다를 접어 올린 언어 ― 김선영 시인에게 2026.04.24
바다를 접어 올린 언어 ― 김선영 시인에게

바다를 접어 올린 언어

― 김선영 시인에게

청람 김왕식

  1. 첫 물결

바다는 처음부터 바다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가슴에 오래 접혀 있던

푸른 편지였다

김선영은

그 편지를 펼치지 않고

천천히 접어 올렸다

물결 하나를 들어

그리움이라 부르고

바람 한 줄기를 만져

살아 있음이라 적었다

그의 언어는

소리보다 먼저 젖고

의미보다 먼저 흔들렸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를 읽기 전에

먼저 마음의 발목이

물에 잠겼다

  1. 감각의 길

그는 사물을 보지 않았다

사물 안쪽에서 들려오는

작은 파문을 들었다

숲을 보면

나무보다 먼저 바다를 보았고

바람을 만나면

허공보다 먼저 물살을 느꼈다

그에게 세계는

고정된 풍경이 아니었다

서로 몸을 바꾸며

다른 이름으로 태어나는

끝없는 환승역이었다

빛은 소리가 되고

소리는 살갗이 되고

살갗은 다시

오래된 기억의 문장이 되었다

  1. 그리움의 물성

그리움은

그에게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도

손바닥을 아프게 하는

투명한 돌이었다

때로는 파도였고

때로는 편지였고

때로는 밤새 창문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돌아오지 않는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김선영은

그리움을 슬픔으로만 쓰지 않았다

그리움을

존재의 가장 깊은 근육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그리움은 운다기보다

걸어온다

멀리서부터

발소리를 숨기지 않고

한 생을 밀고 온다

  1. 쉬운 말의 깊은 바다

그의 시어는 쉽다

그러나 쉽게 닿지 않는다

얕은 말처럼 다가와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어려운 말로

세계를 가두지 않고

평이한 말로

세계의 문을 연다

바다는 원래

어려운 이름을 갖지 않는다

바람

파도

그리움

사람

그 몇 개의 말만으로도

한 생은 충분히 젖고

한 시대는 충분히 흔들린다

김선영은 그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화려한 장식 대신

물기 있는 침묵을 남긴다

  1. 파도 소리 나는 편지

누군가에게 보내지 못한 말들이

그의 시에서 파도가 되었다

한 줄은 밀려오고

한 줄은 물러가고

남은 여백에는

젖은 숨소리가 앉았다

편지는 종이에 쓰는 것이 아니라

가슴의 해안에 쓰는 것이라고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

종이 냄새보다

먼 바다 냄새가 먼저 난다

읽는 이는

문장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밀물과 썰물 사이를 걷는다

그 길 끝에서

문득 자신에게 도착한

한 통의 편지를 만난다

  1. 감정이 사건이 되는 순간

김선영의 시에서

감정은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움직인다

부딪힌다

때로는 강타하고

때로는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난다

그리움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사건이다

한 사람을 잊지 못하는 일이

한 세계를 다시 보는 일로 바뀌고

한 번의 상실이

존재 전체를 흔드는 파문이 된다

그의 시는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슬픔에 갇히지 않는다

상처를 말하면서도

상처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본다

  1. 존재의 해안

우리는 모두

자기 안에 해안을 하나씩 가지고 산다

누군가 밀려왔다가 떠난 자리

말하지 못한 이름이

모래처럼 부서지는 자리

그래도 다시 아침이 와서

햇빛이 얇게 내려앉는 자리

김선영의 시는

그 해안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세계가 얼마나 많은 물소리로 이루어졌는지

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넓은 바다를 품고 사는지

늦게야 알게 된다

  1. 바다를 접어 올린 사람

김선영은

바다를 펼쳐 보이는 시인이 아니다

그는 바다를 접어

한 줄의 시 속에 올려놓는다

그 작은 접힘 속에

물결이 있고

달빛이 있고

사랑을 잃은 사람의 숨결이 있고

다시 사랑을 기다리는

오래된 인간의 기도가 있다

그의 시가 조용히 시작되어

끝내 파도처럼 밀려오는 까닭은

그 안에 접힌 바다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1. 헌시

김선영 시인이여

그대의 언어는

물결의 가장 낮은 무릎에서 태어나

사람의 가장 깊은 가슴으로 간다

그대는

쉬운 말로 깊은 곳을 열고

작은 풍경으로 큰 존재를 흔든다

그대의 시 앞에서

우리는 다시 배운다

그리움은 사라진 것을 부르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마음을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가는 힘이라는 것을

시인은 바다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바다가 되어

사람의 내면에 밀려오는 존재라는 것을

오늘

이 짧은 헌사를

그대의 긴 물결 앞에 놓는다

언어가 다하지 못한 자리에서

파도는 다시 말할 것이고

그대의 시는

오래도록

독자의 마음 한쪽에

젖은 빛으로 남을 것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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