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송양우 시인의 시《아버지의 삶》 ㅡ지게의 무게, 사람의 온도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송양우 시인의 시《아버지의 삶》 ㅡ지게의 무게, 사람의 온도 2026.05.01
송양우 시인의 시《아버지의 삶》  ㅡ지게의 무게, 사람의 온도

아버지의 삶

시인 송양우

재 넘고 소롯길 휘청휘청

어제 한 짐 오늘도 한 짐

새경 없는 이바지

세상 풍진 한 바지게

고단했던 삶 지게 내려놓고

어디 가셨나요

불혹의 상처

서산 넘는 해 아침 되면 보련만

돌아오지 못할 황천지객 되었는가

타는 가슴 재만 남아

비통한 마음 알아줄 이가

뉘더란 말이냐

송양우 시인의 시《아버지의 삶》

ㅡ지게의 무게, 사람의 온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아버지는 언제나 앞서 걸었고, 우리는 늘 뒤에서 따라왔다.

그래서 그의 얼굴보다 먼저 기억나는 것은, 굽은 등과 흔들리는 발걸음이다.

이 시는 바로 그 등 뒤에서 시작된다.

“재 넘고 소롯길 휘청휘청”이라는 첫 행은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한 생의 궤적이다. 길은 험하고, 발걸음은 고르지 않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이 흔들림은 나약함이 아니라, 끝내 버텨온 삶의 방식이다.

“어제 한 짐 오늘도 한 짐”이라는 반복은 이 삶의 구조를 단숨에 드러낸다. 변화 없는 노동, 끝나지 않는 책임. “새경 없는 이바지”는 그 노동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보상 없는 헌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삶. 이 시의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소비하며 타인을 지탱한 존재다.

두 번째 연에서 지게는 내려놓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해방이 아니다. “세상 풍진 한 바지게”라는 표현에서 이미 삶은 짐과 동일시된다. 그 짐을 내려놓는 순간, 아버지는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거리로 사라진다.

“어디 가셨나요”라는 물음은 남겨진 자의 자리에서만 가능한 질문이다. 답이 없음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마음, 그 절제된 슬픔이 이 시를 지탱한다.

“불혹의 상처”라는 구절에서 시간은 한 번 더 깊어진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누적되고, “서산 넘는 해”는 반복되는 하루의 끝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끝은 다시 시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황천지객”이라는 단어는 되돌릴 수 없는 단절을 단호하게 드러낸다.

마지막 연에서 남는 것은 재다. “타는 가슴 재만 남아”라는 표현은 감정의 소진 상태를 정확히 짚는다. 더 이상 불꽃으로 타오르지 못하는 슬픔, 남아 있으나 움직이지 않는 고통. “알아줄 이가 뉘더란 말이냐”라는 물음은 고독의 본질을 건드린다. 슬픔은 나눌 수 없을 때 더 깊어진다.

이 시의 언어는 낮다.

그 낮음이 곧 깊이다. 과장하지 않고, 꾸미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놓는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이 작품의 바탕에는 시인의 삶이 놓여 있다. 완도의 섬마을에서 태어나 상경하여 작은 밥집을 꾸려온 사람. 손님에게 집밥 한 끼를 내놓기 위해 부모에게서 배운 방식을 그대로 지켜온 삶. 그 정성은 입소문이 되어,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 발걸음을 불러왔다. 태릉 선수촌의 젊은 선수들까지 찾아오게 만든 것은 음식의 솜씨가 아니라 마음의 온도였다.

20년 넘게 이어온 김장 나눔 또한 마찬가지다. 드러내기 위한 봉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어진 생활의 일부.

하여, 그의 시는 꾸미지 않는다. 대신 살아온 방식이 그대로 언어가 된다.

시집 《찌그러진 양재기》라는 제목이 상징하듯, 그의 시는 완전함을 지향하지 않는다. 외려 삶의 눌림과 흔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작고 소박한 사물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는 시선, 그것이 이 시의 근간이다.

시인은 몸짓은 크지 않지만, 마음은 그보다 훨씬 넓다. 그 넓음이 이 시를 통해 조용히 드러난다.

이 시는 아버지를 말하면서, 동시에 시인의 삶을 비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어떤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

드러내지 않아도 남는 삶.

이 시는 그 자리에 서 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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