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낮아짐으로 더 깊어지는 사람 — 황성구의 《성산일출봉을 품으며》를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낮아짐으로 더 깊어지는 사람 — 황성구의 《성산일출봉을 품으며》를 읽다 2026.05.08
낮아짐으로 더 깊어지는 사람 — 황성구의 《성산일출봉을 품으며》를 읽다

성산일출봉을 품으며

시인 황성구

푸른 오월의 첫 숨이

창을 열어 바다를 들이면 멀리 고요의 등뼈처럼 솟은

성산일출봉

아침빛을 가만히 품고 앉아 있다

나는 펜션 테라스 끝에 기대어 바람의 결을 한 올씩 듣고

신록 번지는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내 안의 파도들을 조용히 가라앉힌다

하얀 빛은 끝내 말이 없으나 쪽빛 물결은 오래된 문장으로 밀려와 나의 어제를 씻어 내고 오늘이라는 이름 하나를 새긴다

일출봉을 품는다는 것은 저 봉우리의 높이를 가지는 일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스스로 낮아지는 일이라는 것을

아침 바다가 나를 데려가는 동안 나는 천천히 나를 놓아주고 오월의 푸른 하늘은

말없이 내 안에 들어와 앉는다

그리하여 이 순간

나는 한 점 작은 섬이 되어 빛의 가장자리에서

오래도록 숨을 고른다

낮아짐으로 더 깊어지는 사람

— 황성구의 《성산일출봉을 품으며》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어떤 사람은 산을 오르며 자신을 높이려 하고, 어떤 사람은 산 앞에 서서 비로소 자신을 낮춘다.

황성구 시인의 《성산일출봉을 품으며》는 후자의 시다. 이 작품은 자연을 바라보는 감상의 차원을 넘어, 존재가 스스로를 비워가는 과정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하여,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성산일출봉이라는 풍경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 풍경 앞에서 점점 작아지고 낮아지는 한 인간의 내면이다.

첫 행에서 “푸른 오월의 첫 숨”이라는 표현은 계절을 단순한 배경으로 두지 않는다. 오월은 여기서 생명의 호흡이며, 존재를 다시 열어주는 시간의 입김이다. 그 숨이 “창을 열어 바다를 들이면”이라는 구절과 만나면서, 시의 공간은 단순한 실내와 실외의 경계를 넘어선다. 바다는 들어오고, 인간은 그 안에 잠긴다.

그리고 그 멀리 “고요의 등뼈처럼 솟은 성산일출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비유는 인상적이다. 대개의 시가 산을 웅장함이나 장엄함으로 묘사하는 데 비해, 황성구는 ‘등뼈’라는 표현을 택한다. 등뼈는 몸을 지탱하는 중심이다.

곧 성산일출봉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오래된 침묵과 시간을 떠받치고 있는 존재의 축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앞에 선 화자는 펜션 테라스 끝에 기대어 “바람의 결을 한 올씩 듣는다.” 여기서 바람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결이며, 지나온 세월의 숨결이다. 듣는다는 표현 또한 중요하다. 그는 자연을 바라보지 않는다. 듣는다. 자연을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고, 자신의 안쪽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내 안의 파도들을 조용히 가라앉힌다”는 구절에 이르면, 이 시가 단순한 풍경시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파도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도 쉼 없이 밀려오고 부딪히는 감정의 물결이 있다. 황성구 시인은 성산일출봉 앞에서 그 파도를 가라앉힌다. 그것은 억지의 침묵이 아니라, 자연 앞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비움이다.

특히 이 작품의 중심은 다음 구절에 있다.

“일출봉을 품는다는 것은

저 봉우리의 높이를 가지는 일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스스로 낮아지는 일이라는 것을”

이 문장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황성구 시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철학처럼 읽힌다. 그는 한평생 타인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깊은 불심 속에서 매일 새벽 백여 명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로 하루를 연다. 자신의 안녕보다 타인의 평안을 먼저 품는 삶. 그러한 이타심은 화려한 선언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외려 조용한 새벽의 기도 속에서, 말없이 남을 위해 살아가는 태도 속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제주에서 마주한 성산일출봉은 단순한 자연 경관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높이 솟아 있으나 스스로 높음을 말하지 않는 봉우리. 바다를 품고 있으나 한 번도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존재. 황성구 시인은 그 앞에서 ‘겸허의 미학’을 배운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미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비로소 그 풍경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연은 이 시를 더욱 깊게 만든다.

“나는 한 점 작은 섬이 되어

빛의 가장자리에서

오래도록 숨을 고른다”

여기서 시인은 더 이상 풍경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섬이 된다. 하나의 작은 존재로 자연 속에 놓인다. 인간 중심의 시선은 사라지고, 세계와 자신이 같은 숨결 안에 놓이는 순간이다. 그 자리에서 그는 숨을 고른다.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다시 살아갈 시간을 준비하듯.

황성구의 시는 말이 크지 않다. 그러나 그 낮은 목소리 안에는 오랜 수행처럼 다져진 삶의 결이 스며 있다. 높아지려는 시대 속에서 스스로 낮아지는 길을 택한 사람. 그의 시가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는, 그 문장 뒤에 실제로 살아낸 삶이 있기 때문이다.

시 《성산일출봉을 품으며》는 자연을 노래한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어떻게 낮아짐으로 더 깊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고백이다.

ㅡ청람 김왕식

□ 황성구 시인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