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왜 감투를 쓰지 않는가 ―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인들, 그들만의 생존법일까》를 읽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는 왜 감투를 쓰지 않는가 ―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인들, 그들만의 생존법일까》를 읽고 202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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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 그들만의 생존법일까
시인 青民 박철언
비 온 뒤 우르르 돋아난 죽순
문단의 현주소가 어지럽다
세를 불릴 과시욕의 스위치 켜니
순수한 시심의 스위치는 꺼지고
시대정신도 시인 의식도 없이
문단 감투만 노리는 사람들
매일 자라는 명예욕. 급조된 작품으로
단톡방 수없이 도배질하는 사람들
달콤한 덮으로 먹잇감 물어가는 사람들
인성도 교양도 바닥을 잃어버린 사람들
제 조명이 어두워 미혹迷惑한 탓인지
또 다른 명예욕으로 문단 감투를 꿈꾸며
오진誤診한 감투의 그늘로 파고들어
그 밑에서 발 빠르게 충성하는 사람들
순수도 정의도 가물거리는 상실의 시대
남을 인정해 주지도 품을 줄도 몰라
서로 깨부숴 사금파리 들이대는 음모가
시에서는 태동하지 말아야 할 텐더
삼킬 수 없는 걱정과 아픔 몇 올이
이 밤 목울대에 걸려 파닥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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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왜 감투를 쓰지 않는가
―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인들, 그들만의 생존법일까》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는 원래 모자를 쓰지 않는다.
왕관도 쓰지 않고, 감투도 쓰지 않는다.
시는 늘 맨머리로 바람을 맞는 존재다.
헌데, 어느 순간부터 시보다 감투가 먼저 걸어 들어오는 풍경이 생겼다. 작품보다 직함이 앞서고, 언어보다 명함이 두꺼워지며, 시보다 단체 사진이 많아지는 기이한 시대가 되었다.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인들, 그들만의 생존법일까》는 바로 그 풍경을 향해 던지는 씁쓸한 웃음이다.
이 시는 비판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풍자시다.
좋은 풍자는 상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웃음 뒤에 부끄러움을 남기고, 비판 뒤에 성찰을 남긴다.
이 작품이 그런 경우다.
시는 첫 행부터 죽순을 불러낸다.
“비 온 뒤 우르르 돋아난 죽순
문단의 현주소가 어지럽다”
죽순은 본래 생명력의 상징이다.
여기서는 다르다.
깊은 뿌리 없이 갑자기 솟아오른 과잉의 증식으로 읽힌다.
비 한 번 내렸다고 우르르 올라오는 죽순들.
문학적 성숙의 시간이 아니라 숫자의 증가만을 자랑하는 풍경.
시인은 그 장면을 단 두 줄로 압축해 버린다.
그 순간 독자는 죽순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문단의 거울을 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가 특정 인물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서, 더 아프다.
실명이 없기에 누구나 자신을 비춰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를 불릴 과시욕의 스위치 켜니
순수한 시심의 스위치는 꺼지고”
이 구절은 매우 현대적이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스위치”라는 기계적 언어를 사용한다.
과거의 시인이라면 욕망이나 허영을 말했을 것이다.
박철언 시인은 스위치를 말한다.
버튼 하나 누르듯 켜지는 과시욕.
버튼 하나 누르듯 꺼지는 시심.
오늘날 문학이 처한 현실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이 성찰보다 노출에 가까워지고, 작품보다 홍보가 앞서는 시대.
시인은 그 현상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 시의 진짜 힘은 비판의 강도에 있지 않다.
외려 비판하는 사람의 슬픔에 있다.
“삼킬 수 없는 걱정과 아픔 몇 올이
이 밤 목울대에 걸려 파닥거린다”
이 마지막 연에서 시의 본심을 본다.
만약 이 시가 분노만으로 쓰였다면 오래 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는 안타까움이 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느끼는 아픔.
시를 믿는 사람이기에 느끼는 근심.
하여, 마지막 행의 “파닥거린다”는 표현은 더욱 절절하다.
마치 잡히지 않는 물고기 한 마리가 목 안에서 뛰는 것 같다.
말하고 싶지 않은데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고통.
외면하고 싶은데 외면할 수 없는 현실.
그 진동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 시를 읽으며 들은 생각이다.
원래 시인은 별을 세는 사람이지 사람을 세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별보다 사람 수를 세고, 작품보다 회원 수를 세며, 시의 깊이보다 직함의 높이를 재는 풍경이 생겨났다.
물론 모든 시인을 향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도 안온히 자기 언어를 갈고닦으며 이름 없는 별처럼 빛나는 시인들이 훨씬 많다.
박철언 시인이 겨누는 것은 시인이 아니라 시심을 잃어버린 일부의 행태다.
이 작품은 공격이 아니라 경고다.
비난이 아니라 자성의 요청이다.
청민 박철언은 평생 법과 제도를 다루어 온 사람이다.
법은 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장치다.
그런 그가 문학 안으로 들어와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이 문학의 질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말하는 질서는 권위가 아니다.
순수다.
존중이다.
품격이다.
시인이 시인다울 수 있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정신의 질서다.
좋은 시는 때때로 꽃을 노래한다.
좋은 시는 때때로 사랑을 노래한다.
그러나 어떤 시는 병든 곳을 진단해야 한다.
상처를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치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인들, 그들만의 생존법일까》는 그런 의미에서 풍자의 옷을 입은 자성의 시다.
시인은 죽순을 말했지만 사실은 뿌리를 말하고 있었고,
감투를 말했지만 사실은 시심을 말하고 있었으며,
문단을 말했지만 사실은 문학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여, 이 시를 덮고 나면 웃음보다 먼저 묵직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나는 지금 시를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시를 둘러싼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가.
어쩌면 이 시는 타인을 향한 풍자가 아니라,
거울 앞에 선 모든 시인에게 건네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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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걱정을 생각하며
― 청민 박철언 시인께 드리는 작은 글
청민 박철언 시인님.
《시인들, 그들만의 생존법일까》를 여러 번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풍자로 읽었습니다.
두 번째는 비판으로 읽었습니다.
세 번째는 걱정으로 읽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한 사람의 오래된 문학적 양심이 내뱉은 깊은 한숨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시를 읽고 난 뒤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무엇보다 시인님의 시선이 향한 곳이 남이 아니라 문학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문학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문학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시를 아끼지 않는 사람은 시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여, 이 시의 행간에서 저는 분노보다 안타까움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인님.
이 글을 읽으며 저 역시 결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시를 읽고 시평을 쓰는 사람으로서, 문학의 주변을 맴돌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저 또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작품보다 이름을 먼저 본 적은 없었는지.
혹시 문학보다 문단을 먼저 생각한 적은 없었는지.
혹시 순수한 감동보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흔들린 적은 없었는지.
부끄럽게도 그렇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기에 부족했고,
문인이라 해서 늘 맑기만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시인님의 시가 아픈 이유는 그 화살이 특정 누군가를 향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를 읽으며 남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제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고 싶어졌습니다.
시인님께서 말씀하신 걱정은 분명 존재합니다
.
문학보다 명함이 앞서는 풍경.
작품보다 직함이 더 크게 보이는 풍경.
언어보다 사진이 먼저 떠도는 풍경.
그런 모습들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너무 염려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전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만난 수많은 문인들 가운데는 여전히 순수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시를 쓰는 사람.
상 하나 받지 못해도 언어를 갈고닦는 사람.
새벽에 일어나 한 줄의 시를 위해 사전을 뒤적이는 사람.
누가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문학을 놓지 않는 사람.
그런 시인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분들은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원래 진짜 뿌리는 땅 위에 드러나지 않는 법이니까요.
꽃은 눈에 보이지만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숲을 지탱하는 것은 꽃이 아니라 뿌리입니다.
문단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소란스러운 목소리는 멀리 들리지만, 문학을 떠받치는 힘은 언제나 조용한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오래 참고,
오래 읽고,
오래 쓰는 사람들.
그분들이 있기에 문학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시인님께서는 평생 법학자와 공직자로 살아오셨습니다.
법은 질서를 세우는 일이고,
공직은 공동체를 지키는 일입니다.
지금 시인님께서 하고 계신 일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문학의 양심을 지키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법으로 강제할 수 없고,
명령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서만 유지됩니다.
그래서 시인님의 걱정은 귀합니다.
그 걱정 자체가 이미 문학에 대한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믿습니다.
문학은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문학은 늘 시끄러운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는 것 같지만, 결국 조용한 사람들에 의해 이어져 왔다는 것을.
역사는 감투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직함을 오래 보존하지도 않았습니다.
끝내 남은 것은 작품이었고,
한 줄의 진실한 문장이었습니다.
세월은 놀랍도록 공정한 편집자입니다.
시간은 가짜 빛을 지우고 진짜 빛만 남깁니다.
그러니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시인님께서 걱정하시는 그 풍경보다 훨씬 더 많은 곳에서, 이름 없이 묵묵히 시를 쓰는 사람들이 오늘도 언어의 밭을 일구고 있습니다.
비가 와도 쓰고,
바람이 불어도 쓰고,
누가 읽지 않아도 쓰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있는 한 시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 믿음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시인님의 시를 읽으며 문학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부디 걱정은 조금 덜어두시고, 지금처럼 깊고 맑은 사유를 계속 시로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시인님의 근심이 문학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그 마음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언젠가 문학의 숲을 돌아보며 오늘의 걱정마저도 따뜻한 미소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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