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나무의 몸속으로 이사 간 어머니의 시간 ― 이희국 시인의 《바람이 앉은 자리》를 읽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나무의 몸속으로 이사 간 어머니의 시간 ― 이희국 시인의 《바람이 앉은 자리》를 읽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바람이 앉은 자리

시인 이희국

그리움은

오래 흐르다가

끝내

나무 속에 옹이로 맺힙니다

산등성이

바람 많은 자리엔

한 그루 나무

저물도록 서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지 끝을 내미는 모습이

푸른 손 같습니다

굽은 결마다

비의 냄새가 배고

햇빛에 데운 시간들이

천천히 스며들어

나무는

속으로 늙어 갑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듯

조용히

나이테 안으로 잠겨 갑니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새벽마다 모아 둔 이슬과

차마 삼키지 못한 한숨들

누군가의 추운 계절을 덮어주려고

제 몸의 온기를 아끼지 않는 나무

나는 문득

그 아래 멈춰 서서

어린 날처럼 올려다 봅니다

말보다 깊은 침묵으로

나를 키워 낸 사람

나는 끝내

그 나무를

어머니라 부릅니다.

나무의 몸속으로 이사 간 어머니의 시간

― 이희국 시인의 《바람이 앉은 자리》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세상에는 나무를 노래한 시가 많다.

허나, 이 작품은 나무를 바라보지 않는다. 외려 나무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 결 사이에 숨어 있는 한 사람의 생애를 만져본다. 독자는 어느 순간 나무를 읽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의 마지막 행에 이르러 자신이 한 어머니의 등을 오래 쓰다듬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바람이 앉은 자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옹이’다.

“그리움은 오래 흐르다가 / 끝내 나무 속에 옹이로 맺힙니다”

그리움을 눈물이나 강물, 안개로 표현하는 경우는 흔하다.

이 시는 그리움이 흘러가다 굳어버린 자리, 상처가 오래도록 응결된 자리를 옹이라고 말한다. 옹이는 나무가 아팠던 흔적이다. 동시에 살아남은 증거다. 그리움이 흉터가 되었다는 이 표현은 인간의 삶이 결국 상처를 지우는 과정이 아니라 상처와 함께 자라는 과정임을 암시한다.

이 시의 나무는 풍경이 아니다.

산등성이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는 사실상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 가지 끝을 내미는 모습이 / 꼭 푸른 손 같습니다”

여기서 가지는 더 이상 식물의 기관이 아니다. 자식을 향해 내밀었던 손이다. 밥을 차려주던 손, 이마를 짚어주던 손,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던 손이다. 시인은 나무를 인간으로 끌어오지 않는다. 인간을 나무의 형상 속으로 조용히 옮겨 심는다.

이 시에는 유난히 침묵이 많다.

말보다 먼저 결이 있고, 설명보다 먼저 바람이 있고, 대답보다 먼저 기다림이 있다.

특히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듯”

이라는 대목은 이 작품의 중심축이다.

시간을 강물처럼 묘사해 온 수많은 문학적 관습을 뒤집는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발견은 어머니의 생애를 가장 정확하게 압축한 문장이다.

어머니들은 대개 시간을 살지 않는다. 시간을 견딘다.

자식의 병을 견디고, 가난을 견디고, 외로움을 견디고, 남모를 눈물을 견딘다.

나이테는 단순한 성장의 기록이 아니다. 견딤이 남긴 연륜의 지문이다.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 데 있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이라는 짧은 행갈이만으로도 긴 세월의 무게를 불러낸다.

이슬인지, 눈물인지, 새벽의 기도인지, 독자는 끝내 구별하지 못한다.

구별할 필요도 없다.

어머니의 삶에서는 그 셋이 늘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은 이 시가 숨겨두었던 문을 열어젖힌다.

“말보다 깊은 침묵으로 나를 키워 낸 사람”

이 구절에 이르면 독자는 비로소 안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바람도, 옹이도, 이슬도, 나이테도,

모두 한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불려 나온 증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나는 끝내 그 나무를 어머니라 부릅니다”

에 이르러 시는 설명을 멈추고 울림이 된다.

이 작품은 어머니를 찬양하지 않는다. 눈물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의 생애가 어떻게 나무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은 그늘이 되면서도 누구에게도 그늘을 이야기하지 않고, 속은 비바람으로 갈라지면서도 바깥에는 푸른 잎을 내어주는 존재.

그것이 이희국 시인이 발견한 어머니의 본질이다.

《바람이 앉은 자리》는 나무에 관한 시가 아니다.

세월이 한 인간의 몸속에 어떻게 나이테를 만들고, 그 나이테가 어떻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읽고 나니

나무 한 그루가 달라 보인다. 산길에서 마주친 늙은 느티나무도, 마을 어귀의 팽나무도, 집 앞 감나무도

불현듯 누군가의 어머니처럼 보인다.

아마 좋은 시란 그런 것일 것이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 하나쯤은 조용히 바꾸어 놓는 일.

이 시는 나무를 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너무 늦게 알아본 어머니의 침묵을 다시 읽게 한다.

나무를 닮아가시는 분께

― 이희국 시인님께

바람은 아무 곳에나 머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이 오래 비워진 자리, 상처마저 향기로 마른 자리에서만 잠시 짐을 내려놓는다고 합니다.

동경 이희국 시인님,

시인님의 시를 읽다가 불현듯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만난 듯했습니다.

꽃이 피었다고 자랑하지 않고, 그늘이 넓다고 내세우지 않으며,

새들이 잠시 쉬어 갔던 자리마저 조용히 품어 안고 있는 나무 말입니다.

세상은 늘 더 높이 오르는 법을 이야기하지만,

시인님께서는 더 깊이 뿌리내리는 법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하여,

동경 이희국 시인님의 문장에서는 비가 그친 뒤 흙냄새가 나고,

저녁 무렵 어머니께서 걷어 들이신 빨래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시를 쓰신다고 말하지만,

제게 시인님은 시를 쓰시는 분이라기보다 한 편의 나무가 되어 살아오신 분처럼 생각이 듭니다.

세월이 칼이었다면,

시인님께서는 상처를 감추지 않으시고 그 상처가 아름다운 나이테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꺾이지 않는 것이 강함이 아니라,

바람에게조차 잠시 쉬어 갈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참된 강인함임을,

시인님의 시는 말없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훗날 누군가 시인님의 이름을 미처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산길 어느 굽이에서 그늘 좋은 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알지 못한 채 시인님 곁을 다녀가게 될 것입니다.

그 나무 아래에서 이유 없이 마음이 따뜻해진다면,

그것은 아직도

한 시인께서 바람의 의자를 놓아두시고

안온히 세상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지금처럼 따뜻한 시와 맑은 마음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에 푸른 그늘을 드리워 주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김왕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