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신의 붓끝이 머문 자리 ― 김선영 시인의 《사가(思歌)》를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신의 붓끝이 머문 자리 ― 김선영 시인의 《사가(思歌)》를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가 思歌

시인 김선영

꽃 흘러 핀

가지

한 송이

…한 송이

채색하시는

신神의 화필이

뚝 멎어

끝난 자리

더 하나

그려 주신

오오 그대 얼굴

신의 붓끝이 머문 자리

― 김선영 시인의 《사가(思歌)》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어떤 시는

언어를 더하며 완성된다.

어떤 시는

언어를 지우며 완성된다.

김선영 시인의 《사가思歌》는 후자에 속한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느낌보다, 오래된 동양화 한 폭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여백이 말을 하고, 침묵이 색채가 되며, 생략된 언어가 외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꽃 흘러 핀 / 가지”

시인은 꽃이 피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꽃이 흘러 피었다고 말한다.

꽃은 원래 피는 것이다.

흐르는 것이 아니다.

헌데,

김선영 시인의 시선 속에서 꽃은 물처럼 흐른다. 빛처럼 흐른다. 계절처럼 흐른다. 생명은 정지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우주의 운동임을 단 두 행으로 보여준다.

“한 송이

……한 송이”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꽃을 세는 것이 아니다.

신이 우주를 그리는 붓놀림의 호흡이다.

한 번 숨 쉬고,

또 한 번 숨 쉬며,

천천히 세상을 채색해 가는 창조의 리듬이다.

“신의 화필이

뚝 멎어

끝난 자리”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보통 사람들은 꽃을 보고 감탄한다.

시인은 꽃을 그리던 붓이 멈춘 자리를 본다.

이것이 김선영 문학의 깊이다.

완성된 결과보다 완성이 끝난 순간을 바라본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흔적에 시선을 둔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뒤 마지막으로 붓을 내려놓은 자리.

그 침묵의 공간.

그 여백의 공간.

그 비어 있는 공간이야말로 이 시의 중심이다.

“더 하나

그려 주신

오오 그대 얼굴”

여기서 시는 갑자기 꽃에서 사람으로 이동한다.

사실, 이동한 것이 아니다.

꽃과 사람이 하나였음을 뒤늦게 드러낸 것이다.

꽃을 그리던 신이 마지막으로 남겨둔 걸작.

그것이 ‘그대 얼굴’이다.

꽃은 자연의 아름다움이고,

그대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김선영 시인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꽃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지운다.

이 작품은 연시이면서도 존재론적 찬가가 된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창조를 말하고,

한 사람을 말하면서도 우주를 말한다.

짧은 시지만 깊이는 결코 짧지 않다.

외려, 오랜 세월 언어를 다듬어 온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압축의 경지에 가깝다.

김선영 시인의 삶을 떠올리면 이 작품은 더욱 특별해진다.

1950년대 서울사범학교 시절부터 이미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등 당대 문인들로부터 시인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1963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문학 동아리인 ‘청미’를 창설하며 여성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오랜 세월 세종대학교에서 국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과 공부했다.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몸으로 통과해 온 살아 있는 문학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김선영 시인을 만나면 놀라운 것은 경력이 아니다.

겸손이다.

수십 년 문학의 산맥을 걸어온 사람이면서도,

개성의 골목길을 뛰놀던 소녀의 미소를 아직 간직하고 있다.

문학은 나이를 먹지만,

시심은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해서,《사가思歌》를 읽으면 한 편의 시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가 보인다.

화려한 수사가 없다.

과장된 철학도 없다.

대신, 평생 언어를 갈고 닦은 장인의 숨결이 있다.

수많은 계절을 지나온 나무의 나이테 같은 문장이 있다.

김선영 시인은 꽃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신이 세상을 그리다 잠시 미소 지은 순간을 포착했다.

그 미소가 꽃이 되고,

그 꽃이 다시 사람의 얼굴이 되는 경이로운 장면을 우리 앞에 펼쳐 보였다.

시《사가思歌》는 짧은 시가 아니다.

한 송이 꽃에서 시작해 한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귀착되는,

한 편의 작은 창세기라 불러도 좋을 작품이다.

신의 붓끝은 오래전에 멈추었을지 모른다.

김선영 시인의 시 속에서는 아직도 그 붓끝에서 꽃 한 송이가 안온히 피어나고 있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