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꽃이 아니라 사람이 피어 있던 울타리 — 뜨락 시인의 《오월, 울타리 꽃이 울던 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꽃이 아니라 사람이 피어 있던 울타리 — 뜨락  시인의 《오월, 울타리 꽃이 울던 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오월, 울타리 꽃이 울던 날

시인 뜨락

언양 오일장

사람들 발길 사이에서 데려온

어린 장미 한 그루

강변 아파트와 맞바꾼

마당 있는 집이 좋다며

웃던 정숙이네 뜰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거름 한 줌 없어도

햇살만 먹고

푸른 숨을 밀어 올리던 장미

손길이 부지런한 집은

잔디도 윤기가 났고

라일락은 향기로 피어났으며

자주목단은 붉은 웃음을 걸었고

장미들마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계절을 맞이하곤 했다

십수 년

울타리 너머로

웃음소리 끊일 날 없던 집

바람도 머물러 쉬어 가고

저녁노을도

마당 끝에 앉아 가던 집이었다

몹쓸 병이

정숙의 이름을 불러 가던

오월 어느 날

집을 나서는 친구의 뒷모습 따라

울타리 꽃들마저

고개를 떨구었다

한 장

또 한 장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날

그날 이후

오월이 오면

장미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꽃보다 환하던 친구의 웃음이고

라일락 향기보다 먼저 스며드는 것은

울타리 곁에 서성이는

그리움 한 자락이다

기억 저편

꽃잎처럼 흩날리는

아련한 오월이

아직도 그 집 마당에 머물러 있다.

꽃이 아니라 사람이 피어 있던 울타리

— 뜨락 시인의 《오월, 울타리 꽃이 울던 날》

어떤 시는 큰 강을 건너지 않는다.

봉당 밑 작은 뜨락 하나를 맴돌다가

독자의 가슴 한복판에 둥지를 튼다.

뜨락 김영희 시인의 시가 그렇다.

필명 ‘뜨락’은 우연히 붙은 이름이 아니다.

그의 시 세계 전체를 설명하는 하나의 시어이다.

뜨락은 넓지 않다.

세상을 다 담을 수는 없다.

대신

들꽃 한 송이를 끝까지 바라볼 수 있고,

참새 한 마리의 발자국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김영희 시인은 거대한 숲보다

숲 가장자리의 작은 꽃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다.

《오월, 울타리 꽃이 울던 날》 역시

꽃을 노래하는 시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람의 온도를 기록한 시다.

언양 오일장에서 데려온 장미는

식물이 아니다.

친구와 함께 심어 놓은 시간의 묘목이다.

장미가 자라는 동안

꽃도 피었고

우정도 피었으며

계절도 피었다.

시 속의 마당은 공간이 아니다.

한 사람이 살아온 인품의 형태다.

잔디의 윤기,

라일락의 향기,

목단의 웃음.

그 모든 풍경은

정숙이라는 사람의 또 다른 얼굴들이다.

시인은 꽃을 말하면서도

끝내 꽃을 보지 않는다.

꽃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본다.

이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이별시는

사람을 직접 부른다.

김영희 시인은

울타리 꽃을 먼저 부른다.

사람이 떠나자

꽃이 먼저 고개를 숙인다.

그 장면은 마치

집이 한숨을 쉬고,

마당이 눈물을 흘리고,

계절이 상복을 입는 순간과 닮아 있다.

특히

“한 장

또 한 장”

이 짧은 행은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인 동시에

삶의 달력이 찢기는 소리로 읽힌다.

이 시에서 가장 슬픈 존재는

떠난 친구가 아니다.

남겨진 오월이다.

해마다 찾아오지만

예전의 오월로 돌아가지 못하는 계절.

그 계절이

장미 향기 속에 갇혀

울타리 곁을 서성인다.

김영희 시인의 시는

울음을 크게 터뜨리지 않는다.

꽃잎 한 장으로

눈물 한 바다를 건넌다.

소녀의 마음을 오래 간직한 사람만이

이런 시를 쓸 수 있다.

세상은 점점 큰 목소리를 좋아한다.

김영희 시인은 반대로 간다.

들꽃이 바람과 이야기하는 높이,

새가 가지 끝에서 노래하는 높이,

그 낮고 따뜻한 자리에서

시를 쓴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잘 가꾼 정원보다

오래된 마당이 떠오른다.

화려함은 부족할지 몰라도

사람의 체온이 남아 있는 공간.

그곳에서는 꽃도 사람을 기억한다.

김영희 시인의 시는

꽃을 노래하는 시가 아니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꽃이 대신 기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장미도,

라일락도,

목단도 아니다.

한 사람의 따뜻한 생애가

꽃의 형상으로 남아 있는

오월의 울타리다.

그 울타리 안에서

꽃은 피고 지지만,

그리움은

해마다 새순으로 돋아난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