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사다리 ― 임보 시인의 《구름 위의 다락마을》을 읽으며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사다리 ― 임보 시인의 《구름 위의 다락마을》을 읽으며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구름 위의 다락마을

시인 임보

눈을 잃은 사람이 볼 수 없어도 있는

저 언덕 위의 무지개처럼

귀를 잃은 사람이 들을 수 없어도 있는

저 하늘 속의 천둥처럼

우리의 감각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그런 세상도 있나니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만질 수 없는 것이라고

없다고 이르지 말라

저 푸른 구름 위에도 예쁜

다락 마을이 있나니 ᆢ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사다리

― 임보 시인의 《구름 위의 다락마을》을 읽으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학은 때때로 보이는 것을 기록한다.

강물의 흐름을 적고, 꽃이 피는 순간을 적고, 사람의 웃음과 눈물을 적는다.

그런데 더 깊은 문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걸어간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논리로 증명할 수도 없는 영역.

임보 시인의 《구름 위의 다락마을》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시의 첫 행은 존재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던진다.

눈을 잃은 사람이 볼 수 없어도 있는

저 언덕 위의 무지개처럼

무지개는 인간이 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감아도 별은 빛나고, 귀를 막아도 천둥은 울린다.

존재는 인간의 감각보다 먼저 있다.

이 단순한 진술 속에서 시는 이미 현대 문명의 오만을 넘어선다.

오늘의 인간은 보이는 것만 믿는다.

수치로 환산되지 않으면 의심하고, 증명되지 않으면 부정한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증명되지 않는 것들에 의해 유지된다.

사랑이 그렇고,

그리움이 그렇고,

신뢰가 그렇고,

희망이 그렇다.

임보의 시는 바로 그 invisible world, 보이지 않는 세계의 복권을 시도한다.

시 속의 ‘다락마을’은 단순한 이상향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이 오래도록 꿈꾸어 온 원형적 공간이다.

동양에서는 무릉도원이라 불렀고, 신선이 노니는 선계라 불렀으며, 서양에서는 유토피아라 불렀다.

이름은 달라도 본질은 같다.

인간은 늘 현실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을 꿈꾸어 왔다.

임보 시인은 그 꿈의 주소를 ‘구름 위’에 적어 놓는다.

흥미로운 점은 그 공간이 웅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천궁도 아니고, 황금 궁전도 아니다.

다락마을이다.

‘다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정서는 매우 특별하다.

높지만 높지 않고, 멀지만 멀지 않다.

아이의 비밀이 숨겨진 곳이며, 낡은 추억이 쌓이는 곳이다.

거대한 이상향이 아니라 따뜻한 귀향의 공간.

임보 시인은 이상세계를 신비화하지 않는다.

외려 인간의 체온이 남아 있는 장소로 그려낸다.

하여, 그의 선경은 종교적 계시가 아니라 생활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시인은 이 작품을 신선사상의 본격적 구현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이 연작은 한국 현대시에서 드문 시도이다.

우리 문학 속 신선사상은 대개 한 편의 시나 한 장면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청산에 들어가 은거하거나, 구름을 타고 오르는 상상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임보 시인은 그 세계를 단순한 풍경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곳에 마을을 만들고, 사람을 살게 하고, 삶을 지속시킨다.

이 점에서 《구름 위의 다락마을》은 신선사상의 서정화가 아니라 신화화의 과정에 가깝다.

시인이 직접 말했듯 ‘새로운 신화’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란 무엇인가.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인간이 가장 오래 간직해 온 소망의 형상이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이 새가 되었고, 죽음을 넘어가고 싶다는 꿈이 신선이 되었다.

임보 시인의 시 역시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다.

그의 상상력은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을 넘어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시의 핵심은 도피가 아니다.

비상(飛上)이다.

현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넓은 차원을 향해 날아오르는 일이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시인의 언어 태도이다.

임보 시인의 시는 어렵지 않다.

철학을 말하지만 철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을 이야기하지만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

무지개.

천둥.

구름.

다락마을.

모두 가장 순수한 상상력의 사물들이다.

그 단순함 속에서 시는 깊어진다.

마치 오래된 동화 한 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동화의 바닥에는 존재론적 사유가 흐르고 있다.

김춘수 시인의 시가 존재의 이름을 물었다면,

임보 시인의 시는 존재의 보이지 않는 주소를 묻는다.

미당의 시가 신화를 민족의 원형으로 불러냈다면,

임보 시인의 시는 신화를 미래의 가능성으로 확장한다.

그가 꿈꾸는 선계는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앞으로 도달해야 할 정신의 영토이다.

《구름 위의 다락마을》은 한 편의 시가 아니다.

인간의 감각이 미처 닿지 못하는 곳을 향해 놓인 한 줄의 사다리이다.

세상은 점점 더 계산 가능해지고, 효율과 속도가 가치를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럴수록 이런 시는 더욱 소중해진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

손에 잡히지 않아도 삶을 지탱하는 것들.

임보 시인은 그 잊힌 가치들을 향해 ‘구름 위에 작은 다락’ 하나를 지어 놓았다.

그 다락의 창문을 열면

무지개는 여전히 걸려 있고,

천둥은 여전히 울리고 있으며,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못한 꿈 하나가

푸른 구름 위에서 천천히 자라고 있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