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가 가르친 뿌리의 문법 ― 송정우 시집 《모래톱 끝에서》를 읽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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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톱 끝에서
시인 송정우
단단한 모래 위에 섰다
두 발이 벌써 뿌리를 내린다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며
마지막 숨결로 발 밑에 쓰러진다
먼바다가 머물다 가는 자리
허공의 기둥 붙잡고 기우뚱하다
파도는 거짓말쟁이
빼앗으면서 주고, 무너뜨리며 세운다
물살이 경계선을 무너뜨릴 때
대지는 낮아지면서 견고해졌다
단단함은 쌓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잃어가면서 채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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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가 가르친 뿌리의 문법
― 송정우 시집 《모래톱 끝에서》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대부분의 사람들은 뿌리를 흙에서 찾는다.
송정우 시인은 다르다.
그는 뿌리를 모래에서 찾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너지는 자리에서 뿌리를 발견한다.
흔들리는 곳에서 단단함을 찾고, 사라지는 곳에서 존재를 발견하며, 잃어가는 자리에서 채워짐의 비밀을 캐내는 시인이다.
그의 시《모래톱 끝에서》는 모래로 지은 성이 아니다.
허물어짐의 신학이며, 사라짐의 존재론이며, 낮아짐의 철학이다.
시집의 표제작 《모래톱 끝에서》는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선언문이다.
“단단한 모래 위에 섰다
두 발이 벌써 뿌리를 내린다”
얼핏 역설이다.
모래는 원래 뿌리가 내리지 않는 곳이다. 흩어지고 밀려가고 무너지는 공간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뿌리를 본다.
이 한 줄은 시인 송정우 시 세계의 출발점이다.
그에게 삶은 견고한 암반 위의 성채가 아니다.
언제든 밀려오고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톱이다.
인간은 그 위에 서 있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살아간다.
시인은 파도를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파도는 거짓말쟁이 빼앗으면서 주고, 무너뜨리며 세운다”
이 대목은 시집 전체의 사유를 압축한다.
삶 또한 그렇다.
젊음을 가져가면서 성숙을 남기고, 건강을 앗아가면서 지혜를 남기며,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그리움을 남긴다.
세상은 늘 무언가를 빼앗는다.
그런데 그 빼앗김 속에서만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송정우 시인은 그것을 안다.
하여, 그의 시는 상실을 비탄으로만 노래하지 않는다.
상실 속에 숨어 있는 생성의 비밀을 응시한다.
이 시집의 백미는 마지막 연에 있다.
“단단함은 쌓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잃어가면서 채워지는 것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시구가 아니다.
시인이 평생에 걸쳐 도달한 존재의 결론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무엇인가를 더 많이 쌓으려 한다.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자리, 더 큰 명예.
세상은 늘 더하기를 가르친다.
송정우 시인은 반대로 말한다.
진짜 단단함은 덜어내는 데서 온다고.
나무가 겨울에 잎을 버리듯, 강물이 강을 버리고 바다로 가듯, 인간 또한 내려놓을 때 비로소 커진다고.
이러한 시 세계는 시인의 말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그는 “이름표 없는 시간”을 이야기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세상은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성공과 실패, 젊음과 늙음, 시작과 끝.
모든 것에 이름을 붙여 안심하려 한다.
그런데 인생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이 있다.
분꽃은 지고 있는데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
떠난 것도 아니고 머문 것도 아닌 시간.
희망이라 부르기엔 너무 희미하고, 절망이라 부르기엔 아직 빛이 남아 있는 시간.
시인은 바로 그 경계의 시간에 귀를 댄다.
시는 그곳에서 태어난다.
송정우 시의 또 다른 특징은 신성을 발견하는 시선이다.
그는 부르고뉴의 포도밭에서도, 신문지를 덮고 잠든 노숙자의 얼굴에서도,
보리떡을 내미는 아이의 눈망울에서도 같은 빛을 본다.
거창한 종교적 선언이 아니다.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 발견한 경건함이다.
시인은 알고 있다.
신성은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먼저 깃든다는 사실을.
빛은 꼭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굳은 손마디에도, 주름진 얼굴에도, 가난한 나눔에도 빛은 머문다.
송정우 시의 깊이는 여기에 있다.
그는 삶을 미화하지 않는다.
상처를 꽃으로 꾸미지 않는다.
무너짐을 낭만으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무너짐 속에서 끝내 살아남는 생명의 박동을 들려준다.
그 박동은 거창하지 않다.
모래가 빠져나가는 발밑의 감각이고, 서산에 걸린 마지막 햇살이며, 굽은 주름 속에 새겨진 세월의 증명서다.
특히 시인의 말 가운데 가장 오래 남는 문장이 있다.
“벌거벗고도 떳떳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땅”
이 한 문장은 시집 전체의 정신을 설명한다.
인간은 평생 무언가를 걸친다.
직함을 걸치고, 재산을 걸치고, 학력을 걸치고, 명예를 걸친다.
그 모든 것이 벗겨진 뒤에도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는가.
송정우 시인은 그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향한다.
《모래톱 끝에서》는 화려한 수사를 앞세우는 시집이 아니다.
대신 오래 바라보게 하는 시집이다.
읽을수록 더 깊은 곳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마치 썰물 뒤에 드러나는 모래톱처럼,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수많은 생명의 흔적과 시간의 결이 숨어 있다.
시인 송정우의 시는 모래톱을 닮았다.
밟으면 꺼질 듯하지만 의외로 단단하고, 아무것도 없는 듯하지만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끝없이 허물어지면서도 끝내 바다와 맞닿아 있다.
이 시집은 읽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이다.
잠시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발을 얹어 보는 작은 모래톱.
그곳에서 독자는 알게 된다.
인생의 진짜 단단함은 쌓아 올린 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잃지 않은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