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능소화의 화염 속에 되살아나는 천지의 맹세 ― 청민 박철언 시인의 「능소화가 화려한, 아픈 7월」 에 부쳐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능소화의 화염 속에 되살아나는 천지의 맹세 ― 청민 박철언 시인의 「능소화가 화려한, 아픈 7월」 에 부쳐 2026.07.18
능소화의 화염 속에 되살아나는 천지의 맹세 ― 청민 박철언 시인의 「능소화가 화려한, 아픈 7월」 에 부쳐

능소화가 화려한, 아픈 7월

시인 청민 박철언

진초록 땅 위에 태양이 타오르고 이육사의 청포도가 생각나는 7월은 나에겐 민족분단의 아픔을 절감하게 합니다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선언*을 뒷받침하여

다음해 7월2일 대북 비밀특사로 백두산 정상 천지에 올라

북측 대표들과 조국통일을 다짐했던 그 감동!

34년 세월이 지났건만

총부리 겨눈 채, 대결과 적대

갈등은 오히려 깊어만 갑니다

간절히 님을 사모하다 죽었다는 능소화가

화려하게 고개를 드는 7월에는 천지에서의 맹세가

더욱 고통스럽게 다가옵니다

  • <주> 대북 포용정책과 공산권과의 수교를 위한 북방정책의 과감한 추진으로 노 태우 대통령 임기 내인 1991.12 남북 기본합의서 1992.2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을 이루고, 39개 공산국가와 새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전방위 자주 세계 외교 시대를 열게 하였음.

능소화의 화염 속에 되살아나는 천지의 맹세

― 청민 박철언 시인의 「능소화가 화려한, 아픈 7월」 에 부쳐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꽃은 담장을 오르는데,

역사는 아직 철책을 넘지 못했다.

시인 청민 박철언 시인의 「능소화가 화려한, 아픈 7월」 은 꽃을 노래하면서 꽃에 머물지 않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능소화는 여름 담장을 타고 오르는 한낱 관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루지 못한 통일의 염원이며, 역사의 벽을 짚고 끝끝내 하늘을 향해 오르는 민족의 붉은 손이다. 꽃잎은 화려하되 그 빛깔의 안쪽에는 오래 삭지 않은 분단의 통증이 서려 있다.

첫 연의 “진초록 땅 위에 태양이 타오르고”라는 문장은 7월의 계절감을 단번에 불러낸다. 진초록과 태양은 생명의 충만을 드러내지만,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풍경은 순수한 자연의 장면으로 남지 않는다.

이육사의 「청포도」 가 환기되면서 7월은 기다림과 민족의식이 겹쳐지는 역사적 계절로 바뀐다. 여름은 푸르지만 조국의 허리는 잘려 있고, 태양은 뜨겁지만 남북의 마음은 얼어 있다. 이 상반된 감각이 작품의 정서를 깊게 만든다.

이 시의 중심에는 1988년 7월 7일의 특별선언과 이듬해 7월 2일 백두산 천지에서 이루어진 통일의 다짐이 자리한다. 시인은 한 시대의 정책과 외교를 건조한 기록으로 옮기지 않는다. 직접 백두산 정상에 올라 북측 대표들과 조국통일을 다짐했던 순간을 “감동”이라는 한 단어에 응축한다. 그 감동은 개인의 추억인 동시에 민족사의 한 장면이다. 한 사람이 천지에 올라 바라본 물빛은 곧 남과 북이 함께 바라보아야 할 미래의 거울이 된다.

백두산 천지는 이 작품에서 특별한 상징성을 지닌다. 천지는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면서 가장 깊은 물을 품는다. 높이와 깊이가 한 몸으로 만나는 장소다. 시인이 그곳에서 통일을 다짐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선다. 민족의 가장 높은 이상과 가장 깊은 상처가 동시에 마주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날의 맹세는 천지의 물속으로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를수록 더 선명한 파문으로 시인의 가슴에 번져 온다.

“34년 세월이 지났건만” 이라는 대목에서 시의 호흡은 무거워진다.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천지에서 나눈 다짐 뒤에도 총부리는 거두어지지 않았고, 대결과 적대의 언어는 더 거칠어졌다. 시간은 흘렀으나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시계의 바늘은 수십 년을 건넜지만 분단의 시각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멈추어 있다. 이 문장은 짧지만, 그 안에는 통일을 위해 행동했던 한 정치인의 회한과 한 시인의 비통함이 함께 들어 있다.

작품의 미학적 절정은 능소화가 등장하는 마지막 연이다. 능소화는 간절히 님을 사모하다 죽은 여인의 전설을 품고 있다. 시인은 이 전설을 분단 현실과 포개어 놓는다. 여기서 ‘님’은 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 만나지 못하는 북녘의 혈육이며,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한 조국이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통일의 미래다. 능소화가 담장을 오르는 모습은 만나지 못한 님을 향해 온몸을 뻗는 민족의 몸짓처럼 보인다.

특히 “화려하게 고개를 드는 7월” 이라는 구절은 아름다움과 고통을 한 자리에서 충돌시킨다. 꽃은 눈부시게 피는데 시인의 마음은 더 아프다. 화려함이 슬픔을 가려 주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는 역설이 이 작품의 핵심 정조다. 능소화의 주홍빛은 축제의 빛이 아니라, 아직 아물지 않은 역사의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빛이다.

이 작품은 서정시의 외형 안에 현대사의 증언을 품고 있다. 흔히 정치적 사건을 시에 담을 때 언어가 선언으로 굳어지기 쉽다.

청민 박철언 시인은 자신의 체험을 자연의 이미지와 결합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에 정서적 생명을 부여한다. 이육사의 청포도, 백두산 천지, 능소화라는 세 개의 상징은 각각 기다림, 맹세, 그리움의 축을 이룬다. 이 세 축이 한 편의 짧은 시 안에서 서로를 밀고 당기며 작품의 깊이를 만든다.

청포도는 오지 않은 손님을 기다리는 푸른 염원이다. 천지는 남북이 하나 되기를 다짐한 민족의 제단이다. 능소화는 끝내 만나지 못한 님을 향해 피어나는 붉은 절규다. 푸름에서 시작한 시가 붉음으로 끝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푸른 기대가 붉은 통증으로 변해 온 세월, 그것이 이 시가 품은 34년의 역사다.

작품 하단의 주석은 시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확장한다. 남북기본합의서,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라는 역사적 성과는 시인의 감상이 막연한 향수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 준다. 그의 그리움은 실제 행동과 성취의 기억 위에 놓여 있다. 이 점에서 작품의 화자는 과거를 미화하는 회고자가 아니라, 한때 가능했던 평화의 문을 기억하는 증언자다.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는 거대한 통일 담론을 능소화 한 송이의 표정 속에 담아낸다. 국가와 민족, 외교와 분단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꽃의 몸으로 말한다. 능소화는 담장을 넘지 못하지만 담장 위로 오른다. 뿌리는 한쪽에 묶여 있어도 꽃은 다른 쪽 하늘을 향한다. 이 모습은 분단된 조국의 운명과 닮았다. 국경과 철책은 땅을 가를 수 있어도 그리움까지 나눌 수는 없다.

이 시를 읽고 나면 7월의 능소화는 이전과 같은 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붉은 꽃잎마다 천지에서 나눈 약속이 매달려 있고, 길게 늘어진 꽃술마다 돌아오지 못한 세월이 흔들린다. 꽃은 해마다 다시 피지만 통일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꽃이 피는 까닭은 기다림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소화가 화려한, 아픈 7월」 은 통일을 낡은 구호가 아니라 인간의 그리움으로 되돌려 놓는다. 통일은 영토를 합치는 일이기 전에 헤어진 마음을 다시 잇는 일이며, 체제를 논하기 전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다. 시인은 백두산 천지의 맹세를 능소화의 붉은 꽃잎에 옮겨 심었다. 이제 그 꽃은 한 사람의 기억을 넘어 민족의 기억으로 피어난다.

한반도의 7월은 여전히 뜨겁다. 태양 때문만은 아니다. 이루지 못한 약속이 아직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민 박철언 시인의 능소화는 바로 그 식지 않은 약속의 불꽃이다.□

청민 박철언 시인께 드리는 글

청람

한 사람의 생애를 설명하는 데는 직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법조인으로, 정치인으로, 공직자로 살아온 세월은 이력으로 남습니다.

문학인으로 살아온 시간은 영혼으로 남습니다.

청민 박철언 시인을 바라볼 때마다 저는 늘 후자의 모습을 먼저 떠올립니다.

국가의 운명을 고민하는 자리에서는 냉철한 이성을 잃지 않았고, 문학 앞에서는 한없이 순수한 감성을 간직해 온 분.

그 오랜 세월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의 중심에 오래 머문 사람은 언어가 메말라지기 쉽습니다.

현실의 무게에 오래 눌린 사람은 마음의 샘이 마르기 쉽습니다.

그런데도 시인께서는 마음 한편에 끝내 소년의 감성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이육사의 「청포도」 를 사랑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 시를 단지 좋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문을 가슴에 품고 암송하시는 모습에서 저는 시를 읽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살아가는 한 인간을 만납니다.

‘내 고장 칠월은…’

그 첫 구절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시인께서는 이미 이육사의 정신과 마주하고 계십니다.

푸른 청포도 속에서 조국을 바라보았던 시인의 마음을, 오늘의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품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능소화가 피는 7월이 시인께 더욱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청포도의 푸른 희망과 능소화의 붉은 그리움은 서로 다른 색이지만, 모두 조국을 향한 사랑이라는 한 줄기 뿌리에서 피어난 꽃들입니다.

「능소화가 화려한, 아픈 7월」 은 정치인의 회고가 아닙니다.

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문학인의 고백입니다.

역사를 통과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절제된 언어,

권력보다 인간을 먼저 바라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따뜻한 시선,

그것이 이 작품을 더욱 깊고 오래도록 남게 합니다.

시인께서는 한평생 시대의 한복판을 걸어오셨습니다.

그 긴 여정 속에서도 끝내 순수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 순수가 있었기에 법도 인간을 향했고,

정치도 평화를 꿈꾸었으며,

문학도 끝내 사람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청민 박철언 시인을 시대를 통과한 정치인으로 기억하기보다, 시대를 품어 낸 문학인으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청포도를 끝까지 암송하는 그 마음이 있는 한,

능소화는 해마다 더욱 붉게 피어날 것이며,

시인께서 품어 온 조국을 향한 사랑 또한 우리 문학 속에서 살아 숨 쉴 것입니다.

ㅡ청람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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