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지붕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내린다 ― 한범수 시인의 「비」 를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비는 지붕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내린다 ― 한범수 시인의 「비」 를 읽다 2026.07.20
□ 한범수 교수의 ‘파랑창고’ 정원
□ 처마에 맺힌 이슬방울 ㅡ 사진 한범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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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시인 한범수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창으로 스며드는 찬바람
루핑 덮은 판잣집
크고 작은 그릇
또르락 떨어지던 빗방울
걸레 짜는 손
꾸벅 졸던 백열전구
화들짝 놀라는 창틀
바닥에서 튀어오르는
빗방울 하나, 둘
백결선생 손사위
양말 깁던 어머니 손
비가 내린다
비가…
□ 한범수 교수 ㅡ 손주와 산책

□ 자작시 해설
파랑창고에 비가 내린다.
새벽잠이 저만치 달아난다. 샌드위치 패널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서라운드 음향 그 자체다.
왕십리 무학초등학교 뒤편 판잣집에 내리던 빗소리가 떠올랐다. 비가 오면 천장 틈새로 떨어지던 빗방울, 빗물 받는 그릇의 수가 하나씩 늘어났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빗소리를 듣는다.
ㅡ 청휘 한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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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지붕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내린다
― 한범수 시인의 「비」 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범수 시인의 「비」 는 비를 노래한 시가 아니다. 이 작품에서 비는 기상이 아니라 기억이며, 물방울이 아니라 시간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는 이미 오래전 끝났을지 모른다.
시인의 내면에서는 아직도 어린 시절의 빗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이 시는 그 오래된 빗소리를 현재의 시간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기억의 악보다.
첫 행부터 독자는 소리가 먼저 시를 읽는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 창으로 스며드는 찬바람.”
이 두 줄은 풍경을 묘사하지 않는다. 청각과 촉각을 동시에 열어 놓는다. 비는 귀를 적시고, 바람은 피부를 스친다. 독자는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빗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곧이어 등장하는 “루핑 덮은 판잣집”은 이 작품의 문을 여는 열쇠다. 시인은 가난을 말하지 않는다. 루핑 한 장으로 시대를 호출한다. 그 한 장의 얇은 지붕 아래에는 빗물이 떨어지고, 그 빗물을 받기 위해 늘어나는 그릇들이 있다. 그 그릇은 단순한 생활도구가 아니다. 가난이 물소리를 담아 두던 작은 기억의 우물이다.
특히 “크고 작은 그릇”이라는 표현은 놀랍도록 절제되어 있다. 그릇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독자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집의 형편을 읽게 된다. 좋은 시는 현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현실이 스스로 말을 하게 만든다. 한범수 시인은 그 언어의 여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시인이다.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걸레 짜는 손”이다. 겨우 다섯 글자이지만 그 손은 한 가족의 생계를 짜고, 하루를 짜고, 삶을 짜낸다. 그 손은 어머니의 손이면서 시대의 손이다. 물을 닦는 행위가 아니라 가난을 견디는 몸짓으로 읽힌다.
이어지는 구절은 더욱 인상적이다.
“꾸벅 졸던 백열전구 / 화들짝 놀라는 창틀.”
전구가 졸고 창틀이 놀란다.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의인법이지만 조금도 인위적이지 않다. 오래된 집은 사람과 함께 늙는다. 전구도 피곤하고 창틀도 놀란다. 사물마저 가족이 되는 순간, 시는 현실을 넘어 생명의 공동체를 이룬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절정은 마지막 두 행이다.
“백결선생 손사위 / 양말 깁던 어머니 손.”
이 장면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검소함과 사랑이 하나의 손짓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백결선생의 일화는 궁핍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삶을 상징한다. 그 정신은 양말을 기우던 어머니의 손끝에서 오늘의 언어로 다시 살아난다. 문화와 일상이 하나의 장면으로 겹쳐지는 이 대목은 시인의 인문학적 깊이를 보여 준다.
시의 마지막은
“비가 내린다 / 비가…” 라는 반복으로 끝난다. 여기서 생략 부호는 문장이 끝나지 않았음을 뜻한다. 비는 지금도 내리고 있으며, 기억 또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인은 말을 멈추었지만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계속 비가 내린다. 이것이 이 작품이 가진 여운의 힘이다.
한범수 시인은 자작시 해설에서 “어린 시절 판잣집의 빗소리가 오늘 ‘파랑창고’ 의 지붕 위에서 다시 울린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음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은 집을 바꾸어도 기억의 지붕은 바뀌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빗소리는 가장 늦게 늙는 소리다.
평생 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해 온 학자인 한범수 시인은 은퇴 후에도 삶을 멈추지 않았다.
용인의 고즈넉한 둔덕에 자리한 ‘파랑창고’는 단순한 집이 아니라 그의 사유가 머무는 서재이며, 삶이 문학으로 익어 가는 작은 우주다. 텃밭을 일구고, 책을 읽고, 음악을 작곡하며, 색소폰을 연주하는 그의 하루는 자연과 예술이 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생활의 리듬을 만든다.
곁에서 도예작가인 아내가 흙으로 작품을 빚는 모습 또한 아름답다. 한 사람은 언어를 빚고, 한 사람은 흙을 빚는다. 한 사람은 음을 만들고, 한 사람은 형태를 만든다. 그들의 삶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예술과 일상이 서로를 따뜻하게 비추며 흘러간다.
한범수 시인의 「비」 는 화려한 기교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오래 묵은 기억을 천천히 불려 내어 삶의 본래 온도를 회복시킨다. 그의 시에서는 빗소리가 곧 어머니의 숨결이고, 낡은 지붕은 유년의 시간이며, 떨어지는 물방울은 인간을 사람답게 만든 기억의 음표가 된다.
좋은 시는 독자의 눈을 적시기보다 마음속에 오래 젖어 있는 법이다. 「비」 는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이 시를 덮고 나면 귀에는 여전히 빗소리가 들린다. 그 빗소리는 하늘에서 내리는 소리가 아니다. 사람을 끝내 사람으로 남게 하는 기억이, 마음의 지붕을 오래 두드리는 소리이다.□
□ 한범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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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존경하는 청휘 한범수 시인께.
생각해 보니
청휘 한범수 시인과 함께한 세월이 어느덧 반세기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오십 년이라는 시간은 달력으로 헤아리면 긴 세월이지만, 좋은 벗과 함께한 기억은 언제나 어제 일처럼 선명합니다.
경복고등학교 교정에서 같은 꿈을 품었던 소년들은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세월은 우리의 모습을 바꾸었지만, 청휘 한범수 시인의 따뜻한 인품과 학문을 향한 성실함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오랫동안 청휘 한범수 시인을 깊이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청휘 한범수 시인은 평생 대학 강단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 오셨습니다. 지식을 전하는 교육자를 넘어 삶의 품격을 몸소 보여 주는 스승으로 살아오셨습니다. 은퇴 후에도 용인의 고즈넉한 둔덕에 자리한 파랑창고에서 책을 가까이하시고, 텃밭을 일구며, 음악을 벗 삼아 하루하루를 예술처럼 살아가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전해 줍니다.
색소폰의 숨결로 계절을 연주하고, 악보 위에 삶의 리듬을 새기며, 텃밭에서는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청휘 한범수 시인의 일상은 한 편의 시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되었습니다. 곁에서 흙을 빚는 사모님의 손길과 함께 이루어 가는 삶 또한 화려하지 않기에 더욱 깊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이번 「비」 를 읽으며 다시 한번 청휘 한범수 시인의 문학세계를 생각했습니다. 비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기억을 불러낸 시였습니다. 어린 시절 판잣집 지붕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세월을 건너 오늘의 ‘파랑창고’까지 이어지고, 그 빗소리는 끝내 어머니의 손길과 유년의 온기를 우리 곁으로 데려왔습니다. 오랜 삶을 품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휘 한범수 시인의 시는 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대신 오래 마음에 머뭅니다. 화려한 언어보다 절제된 시어를 선택하고, 기교보다 진실을 앞세우는 문학의 자세는 오늘 우리 문단이 오래 간직해야 할 귀한 본보기입니다.
저에게 청휘 한범수 시인은 단순한 동창이 아닙니다. 서로의 청춘을 기억하는 벗이며, 반세기 동안 기쁨과 세월을 함께 나누어 온 소중한 지우입니다. 삶이 때로는 거센 바람을 몰고 왔어도 우리의 우정은 계절을 잃지 않았고, 그 세월이 지금에 이르러 더욱 귀한 인연이 되었음을 새삼 느낍니다.
앞으로도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파랑창고’의 창가에는 따뜻한 햇살이 머물고, 텃밭에는 사계절의 푸름이 이어지며, 청휘 한범수 시인의 시에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향기가 오래도록 피어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남은 생애에도 지금처럼 학자의 깊이와 시인의 맑은 영혼으로 우리 문학을 더욱 풍요롭게 밝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반세기 우정에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올립니다.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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