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다 ― 변희자 시인의 「분만실」 을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꽃은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다 ― 변희자 시인의 「분만실」 을 읽다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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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만실
시인 변희자
시골집 마당
초록빛 왕잠자리
날개를 파르르 떨며
두리번거린다
맴돌다 멈칫하다
배 끝을 구부렸다 폈다
한낮의 뜨거운 숨을
날개에 품은 채
푸른 숲, 연못을 놔두고
마루 끝 가짜 꽃에
새 생명을 맡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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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다
― 변희자 시인의 「분만실」 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좋은 시는 사물의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익숙하게 바라보던 세상의 역할을 바꾸어 놓는다.
변희자 시인의 「분만실」 은 그 놀라운 전환을 이루어 낸 작품이다. 시인은 왕잠자리를 바라보면서 곤충을 묘사하지 않는다. 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품기 위해 망설이는 순간을 읽어 낸다. 그리하여 평범한 마당은 어느새 분만실이 되고, 장식용 꽃은 생명의 요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시의 첫 장면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시작된다.
“시골집 마당 / 초록빛 왕잠자리.”
단 두 줄이지만 공간과 생명이 동시에 열린다. 독자는 이미 자연 속에 들어와 있다. 그런데 시인은 잠자리를 곧바로 설명하지 않는다. “두리번거린다”, “맴돌다 멈칫하다”라는 움직임을 먼저 보여 준다. 그 망설임은 단순한 비행이 아니다. 새로운 생명을 맡길 자리를 찾는 어머니의 오래된 본능이다.
특히 “배 끝을 구부렸다 폈다”라는 표현은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시어다. 시인은 산란이라는 생물학적 현상을 말하지 않는다. 몸짓 하나만으로 생명의 긴장을 드러낸다. 설명을 덜어 낼수록 생명의 떨림은 더욱 선명해진다. 절제가 곧 깊이가 되는 순간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부신 반전은 마지막 연이다.
“푸른 숲, 연못을 놔두고
마루 끝 가짜 꽃에
새 생명을 맡기려 한다.”
여기서 독자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자연을 뒤로하고 인공의 꽃을 향하는 왕잠자리의 모습은 생태의 역설인 동시에 오늘 인간 문명의 자화상이다. 시인은 그것을 비판하거나 단정하지 않는다. 오직 한 장면만 내어놓는다. 그 장면 앞에서 독자는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생명은 지금 어디에 둥지를 틀고 있는가. 자연은 어디까지 밀려났는가.
변희자 시인의 시는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말을 아낀다. 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오래 생각하게 한다. 그의 시에는 설교가 없고, 대신 오래 머무는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은 독자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의미를 피워 낸다.
평소 변희자 시인의 삶을 떠올리면 이 작품은 더욱 깊어진다. 홍천의 고즈넉한 둔덕, 시냇물이 발아래로 흘러가는 언덕 위에 자리한 집. 그곳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동화가 머무는 정원이다. 꽃은 계절을 기다리고, 나무는 바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작은 곤충 하나도 그곳에서는 한 편의 시가 된다.
삶이 먼저 동화가 되었기에 시 또한 동화의 결을 품는다.
변희자 시인은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다. 정원을 가꾸는 손길은 곧 시어를 가꾸는 손길이며, 꽃을 돌보는 마음은 한 편의 시를 품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다.
무엇보다 변희자 시인의 시는 ‘작은 것의 품격’을 안다. 거대한 풍경보다 작은 생명 하나에 우주의 질서를 담아낸다. 왕잠자리의 날갯짓 하나에서 모성을 발견하고, 가짜 꽃 앞의 머뭇거림에서 생명의 불안을 읽어 낸다. 이러한 시선은 사물을 바라보는 능력이 아니라 생명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분만실」 이라는 제목 또한 탁월하다. 독자는 처음에는 병원의 공간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를 읽고 나면 분만실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는 모든 자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골집 마당도, 꽃 한 송이도, 왕잠자리의 작은 날갯짓도 모두 하나의 분만실이 된다. 제목이 작품 전체를 다시 읽게 만드는 힘을 지닌 것이다.
변희자 시인의 문학은 자연을 기록하는 문학이 아니다. 자연의 숨결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문학이다. 그의 시를 읽고 나면 세상은 조금 달라진다. 꽃은 장식이 아니라 기다림이 되고, 잠자리는 곤충이 아니라 어머니가 되며, 정원은 풍경이 아니라 생명의 학교가 된다.
좋은 시는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각을 새롭게 하는 예술이다. 「분만실」 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이 시를 덮는 순간 독자는 세상을 보는 시선 하나를 새롭게 얻는다. 그것이 변희자 시인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삶이 동화가 된 사람만이 동화 같은 시를 쓸 수 있다. 변희자 시인의 시 세계는 화려한 언어의 숲이 아니라 생명을 톺아 바라본 사람의 맑은 눈동자에서 시작된다. 그 눈동자가 머무는 곳마다 작은 존재들은 제 이름보다 더 큰 의미를 얻고, 평범한 하루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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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변희자 시인께.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듯한 따뜻함이 마음에 번집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쟁도, 소유도, 과장도 없습니다. 작은 꽃 한 송이, 잠자리 한 마리, 바람 한 줄기까지도 생명의 눈으로 바라보는 다정한 마음이 먼저 다가옵니다.
이번 「분만실」 을 읽으며 다시 한번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왕잠자리의 작은 몸짓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노래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참으로 맑고 아름다웠습니다.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생명의 서사로 바꾸어 놓는 힘, 그것이 바로 변희자 시인만의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시인의 작품에서는 자연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가족처럼 느껴집니다. 꽃도 말을 하고, 바람도 숨을 쉬며, 작은 곤충 하나도 우주의 질서를 품은 존재가 됩니다.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닿는 순간 평범한 풍경은 한 편의 동화가 되고, 일상은 오래 기억되는 시가 됩니다.
홍천의 고즈넉한 둔덕 위, 시냇물이 흐르는 언덕에 자리한 아름다운 집과 정원은 시인의 삶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그곳에서 계절을 벗 삼고 꽃과 나무를 친구 삼아 살아가는 모습은 작품보다 먼저 한 편의 시가 됩니다. 삶이 아름다우니 시도 아름답고, 마음이 맑으니 언어 또한 맑게 피어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인은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삶의 태도가 시어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 줍니다. 화려한 기교보다 순수한 생명의 숨결을 먼저 들려주는 시인의 문학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머물 것입니다.
문학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희자 시인의 작품은 우리 시대에 더욱 소중한 문학입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꽃을 바라보게 하고, 작은 생명의 떨림에도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시인의 정원에는 사계절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시냇물은 맑은 노래를 들려주며, 그 풍경 속에서 태어나는 시편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래도록 건강하시고, 지금처럼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시를 함께 빚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청람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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