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青民 박철언 시인의 《오케스트라의 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시인 青民 박철언 시인의 《오케스트라의 밤》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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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의 밤
시인 青民 박철언
위풍당당 들어서는 걸음걸음
제자리를 찾아 숨을 고르고
지휘봉 하나에 날이 서면
활은 현을 타고
그리움을 켠다
바이올린이 먼저
오래 묵은 그리움을 흔들어 깨우고
첼로는 기품 어린 울림으로
산그늘처럼 깊어져 간다
플루트와 오보에 스쳐 지나가면
숲길에 맑은 바람이 불고
클라리넷 한 줄기
온기를 더할 즈음
트럼펫 높이 울려
환한 하늘을 열어젖힌다
팀파니의 둔한 울림 따라
가슴도 함께 뛰고
심벌즈 한순간 번쩍
긴 숨을 삼킨 객석에
환희가 꽃처럼 피어난다
저마다 다른 소리
윤슬처럼 반짝이며
한 물결 되어 피어나고
음악도 사람도
지휘자의 손끝에서
마침내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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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의 문장을 살아온 사람이 음악의 심장을 들을 수 있는 까닭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평생 법조인과 공직자의 길을 걸어온 시인이 이토록 섬세하게 오케스트라의 밤을 그려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놀라움을 안겨 준다.
법은 사실을 분별하고, 책임의 경계를 세우며,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이성의 문장이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감정을 흔들어 깨우고, 말이 닿지 못하는 마음의 심해를 건너가는 영혼의 파동이다.
언뜻 서로 멀리 떨어져 보이는 두 세계가 청민 박철언 시인의 내면에서는 오래전부터 한집에 거주해 왔다.
그가 바이올린에서 “오래 묵은 그리움”을 듣고, 첼로의 울림에서 “산그늘처럼” 깊어지는 기품을 느끼며, 플루트와 오보에의 음색에서 숲길을 건너오는 맑은 바람을 발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느 날 우연히 음악을 가까이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경북고 재학 시절부터 그의 마음 밭에는 문학과 음악을 받아들이는 서정의 씨앗이 이미 심겨 있었고, 그 씨앗은 오랜 세월 법률과 공직이라는 단단한 토양 아래에서도 마르지 않은 채 자신의 계절을 기다려 왔을 것이다.
사람의 감수성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유년과 청소년기에 읽은 한 편의 시, 마음을 오래 붙들었던 소설의 한 문장, 늦은 밤 홀로 들었던 음악 한 곡은 겉으로는 사라진 듯 보여도 영혼의 지층 아래에 퇴적된다. 세월이 흐른 뒤 어떤 빛과 소리, 한 사람의 표정과 마주하는 순간, 오래 묻혀 있던 감성은 다시 지상으로 솟아난다.
박철언 시인의 「오케스트라의 밤」은 바로 그 깊은 내면의 지층에서 울려 나온 작품이다.
그의 청소년기는 단순히 장래를 준비하던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언어의 아름다움과 음악의 떨림을 받아들이며, 세상에는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몸속에 새기던 서정의 수태기였을 것이다. 법률가의 길을 걷기 훨씬 전부터 그의 내면에는 시인이 먼저 입주해 있었다. 법전보다 먼저 마음의 악보를 읽었고, 판결의 문장을 쓰기 전부터 저녁놀과 바람과 그리움의 문법을 익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시절 독문학을 통해 접한 전혜린 교수의 문학적 세계 또한 그의 내면을 더욱 깊게 만든 원동력으로 바라볼 수 있다. 시인이 전해 온 생애의 맥락에 비추어 보면, 전혜린 교수와 독문학을 매개로 만난 유럽 문학의 정신은 젊은 박철언에게 문학이 단순한 교양이나 지식의 장식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응시하는 뜨거운 방식임을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독문학의 세계에는 인간의 고독과 자유, 운명과 죽음, 사랑과 방황을 끝까지 응시하는 무거운 정신이 흐른다. 그 문학을 통과한 젊은 날의 감수성은 훗날 법률과 정치, 국가와 사회라는 거대한 현실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의 내면에서 꺼지지 않는 등잔이 되었을 것이다.
전혜린의 문학정신은 삶을 안전한 해답으로 봉합하기보다 존재의 불안과 열망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 익숙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을 끝없이 탐색하도록 이끄는 불꽃과도 같다.
그러한 독문학적 사유와 문학적 감수성이 청년 박철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면, 그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그의 시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호흡했을 것이다.
법률가는 사건의 겉모습만 보아서는 안 된다. 기록 뒤에 숨은 동기와 사정, 한 인간이 그 지점까지 밀려온 삶의 경로를 살펴야 한다.
시인 또한 사물의 표면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의 음표 속에서 그리움을 듣고, 낮은 현의 떨림에서 산그늘을 보며, 심벌즈의 울림에서 환희가 피어나는 순간을 감지한다.
이 두 시선은 서로 배척되지 않는다.
깊은 법률가는 인간의 사정을 읽어야 하고, 깊은 시인은 세계의 질서를 읽어야 한다. 법이 인간의 행동을 해석하는 학문이라면, 시는 그 행동 뒤에 숨은 영혼의 날씨를 읽는 예술이다.
박철언 시인은 평생 이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 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쪽 눈으로는 법과 원칙, 책임과 정의의 구조를 살폈다. 다른 한쪽 눈으로는 사람의 고독과 그리움, 상처와 희망을 바라보았다.
법률가의 눈만 있었다면 오케스트라의 정확한 질서와 지휘 체계를 보았을 것이다. 시인의 눈이 함께 있었기에 바이올린에서 그리움을 듣고, 첼로에서 산의 그늘을 보며, 클라리넷의 음색에서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 주목할 점은 오랜 법조인의 삶이 그의 서정성을 마르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거친 파도 속에서 살아온 사람은 마음의 결이 굳어지기 쉽다. 수많은 갈등과 판단, 책임과 긴장을 통과하는 동안 감성의 창문을 닫아 버릴 수도 있다.
박철언 시인은 그 창문을 닫지 않았다.
젊은 날 문학과 음악이 그의 내면에 심어 놓은 씨앗은 법률의 문장 사이에서도 숨을 쉬었다. 공직의 무거운 책상 아래에서도 뿌리를 뻗었고, 정치와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제 생명의 푸른 기운을 잃지 않았다. 젊은 날 품었던 문학심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과 고뇌를 먹으며 더욱 깊은 색으로 익어 갔다.
그에게 문학은 현실을 떠나는 피난처가 아니었을 것이다. 현실을 더 인간답게 바라보게 하는 또 하나의 눈이었다.
음악 또한 잠시 마음을 달래는 장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원리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철학이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오케스트라의 밤」 에서 악기들은 단순한 음향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바이올린은 오래 눌러 둔 기억의 혀가 되고, 첼로는 삶의 심층을 떠받치는 뿌리가 되며, 플루트와 오보에는 굳은 현실의 창문을 여는 바람이 된다.
트럼펫은 침묵하던 희망의 하늘을 열고, 팀파니는 인간의 가슴속에 잠든 용기를 두드리며, 심벌즈는 긴 인내 끝에 도착한 환희의 번개가 된다.
이처럼 악기의 고유한 성정을 포착하는 능력은 음악에 관한 지식만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소리를 사람의 생애와 연결하여 듣는 귀, 음색을 빛과 바람과 산그늘로 번역하는 시적 감응력이 있어야 한다. 그 감응력은 청소년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을 사랑한 삶, 대학 시절 독문학의 깊은 정신과 만나 인간 존재를 사유한 경험, 오랜 세월 수많은 인간 군상을 가까이서 바라본 법조인의 시간이 함께 빚어 낸 결과일 것이다.
청민 박철언 시인의 서정은 현실을 몰라서 맑은 것이 아니다. 현실의 어둠과 무게를 오래 통과하고도 끝내 잃지 않은 맑음이다.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기품은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얻은 고고함이 아니라, 세상의 복잡한 이해와 충돌을 견디고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은 사람이 지닌 내면의 품격이다.
「오케스트라의 밤」 에서 지휘자는 서로 다른 소리를 억압하지 않는다. 바이올린에게 첼로의 음색을 요구하지 않고, 플루트에게 트럼펫처럼 울리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각 악기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하나의 음악을 이루도록 이끈다.
이 장면은 법과 공동체를 오래 고민해 온 시인의 삶과도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좋은 법은 모든 사람을 똑같게 만드는 쇠틀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공동의 박자를 세우는 사회의 악보다. 좋은 지도자 또한 자신의 목소리로 모든 소리를 덮는 사람이 아니다. 각자의 능력과 개성이 가장 아름답게 발현되도록 듣고 조율하며, 자신은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전체의 화음을 이루게 하는 지휘자와 같은 존재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케스트라의 밤」 은 청민 박철언 시인이 걸어온 삶의 여러 강줄기가 한곳에서 만난 작품이다.
청소년기에 품은 문학과 음악의 서정, 대학 시절 독문학을 통해 깊어진 문학심, 법조인으로서 익힌 질서와 균형의 감각, 공직과 정치의 현장에서 체험한 조정과 책임의 철학이 하나의 무대에 올라와 합주한다.
그의 생애 자체가 하나의 오케스트라였는지도 모른다.
법률은 낮고 엄정한 첼로였으며,
공직은 무거운 팀파니였고,
정치는 때로 거센 트럼펫이었다.
문학은 그 모든 소리 사이를 건너며
인간의 체온을 지켜 준 클라리넷이었고,
음악은 굳어질 수 있었던 마음의 창문을
끝내 열어 둔 플루트의 바람이었다.
그 수많은 시간이 청민이라는 지휘봉 아래 모여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되었다.
한평생 법률의 언어로 사회의 질서를 세워 온 사람이 이제 시의 언어로 인간의 화음을 들려준다. 법정과 공직의 자리에서 수많은 사실과 주장 사이의 균형을 살폈던 그의 눈은 오케스트라의 무대에서 수많은 악기가 이루는 질서를 발견한다. 사람의 책임을 판단하던 이성은 음악의 밤을 만나 사람의 그리움과 환희를 읽는 서정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 옷은 새로 마련한 것이 아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가슴 깊이 간직해 온 옷이며, 독문학의 향기 속에서 더욱 짙어진 옷이고, 오랜 현실의 먼지를 견디며 비로소 제 색을 얻은 시인의 오래된 예복이다.
「오케스트라의 밤」 이 아름다운 까닭은 악기의 이름을 고르게 배열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악기들을 통해 한평생 자신의 가슴속에서 울려 온 인간의 노래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법의 문장은 세상의 어긋남을 바로 세웠고,
시의 문장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 두 문장의 뿌리는 다르지 않다.
인간을 귀하게 여기려는 마음이다.
청민 박철언 시인은 법률가의 엄정한 손에 시인의 따뜻한 귀를 지닌 사람이다. 그의 귀는 악기의 소리만 듣지 않는다. 바이올린의 떨림 뒤에 숨어 있는 그리움, 첼로의 낮은 울림 속에 잠긴 세월, 심벌즈가 터지는 찰나에 객석의 가슴에서 피어나는 환희까지 듣는다.
그가 오케스트라를 이토록 서정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까닭은 분명하다.
시인이 뒤늦게 그의 삶에 찾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오래전부터 그의 안에 살고 있었다.
법조인이 법전을 펼칠 때에도
그 내면의 시인은 보이지 않는 악보를 읽고 있었으며,
세상이 판결과 결론을 요구할 때에도
그의 가슴 한쪽에서는
바이올린 한 대가 사람의 그리움을 켜고 있었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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