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곳에서 더 크게 들리는 조국의 목소리 ― 김유조 시인의 「빈 지하의 목소리」에 나타난 분단 기억과 통일 염원의 미학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빈 곳에서 더 크게 들리는 조국의 목소리 ― 김유조 시인의 「빈 지하의 목소리」에 나타난 분단 기억과 통일 염원의 미학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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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지하의 목소리
시인 김유조
철원 노동당사 앞에 서면
문은 닫혀 있고
시간만이 드나든다
지하로 이어진 어둠 속으로는
누구도 내려갈 수 없고
발자국 대신 침묵이 계단을
채운다
그해에 그곳에서 호명되지도
못한 사람들이
비명 속에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바람처럼 전해지지만
벽은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텅 빈 당사는 무너짐을 겨우 붙잡은 채
중수重修를 기다리는 손길 아래 숨
을 고르고
균열마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을 품고 있다
햇빛은 벽에 닿아 부딪쳐 나가
고
그 아래 그림자는 더 짙어져 가
는데
비어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남아 있다고
빈 지하는 웅성거리고 있다
■
빈 곳에서 더 크게 들리는 조국의 목소리
― 김유조 시인의 「빈 지하의 목소리」 에 나타난 분단 기억과 통일 염원의 미학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폐허에는 이상한 청력이 있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발소리를 품고, 문이 닫힌 뒤에도 오래전의 울음을 벽 속에 가두어 둔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듯 서 있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유조 시인의 「빈 지하의 목소리」 가 그러하다.
이 시의 중심에는 철원 노동당사가 서 있다. 그것은 관광객이 잠시 둘러보고 지나가는 낡은 건축물이 아니다.
한 시대가 철근과 시멘트 속에 남겨놓은 거대한 상흔이며,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한반도 현대사의 한 페이지다.
시인은 그 앞에서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누가 옳았는지, 누가 그르렀는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대신 문 하나를 보여준다.
“문은 닫혀 있고
시간만이 드나든다”
이 두 행은 작품 전체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사람에게는 닫혀 있는 문이 시간에게는 열려 있다.
그 문을 통하여 수십 년의 겨울이 드나들었고, 장마가 지나갔으며, 풀들이 자랐다 시들었다. 정권이 바뀌고 세대가 바뀌는 동안에도 그 건물은 한자리에서 분단의 시간을 받아내고 있었다.
더욱 깊은 곳에는 지하가 있다.
그 지하는 단순한 건축적 공간이 아니다.
“누구도 내려갈 수 없다” 는 한 마디에서 지하는 금지된 기억의 공간으로 변한다. 계단을 채우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침묵”이다.
여기서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발자국이 사라진 곳에 외려 수많은 삶의 흔적이 몰려든다.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사람들, 어느 날 끌려갔을지도 모르는 사람들,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던 사람들의 부재가 지하의 어둠을 가득 채운다.
특히
“호명되지도 못한 사람들이”
라는 표현은 아프다.
죽음보다 더 쓸쓸한 것은 이름 없이 사라지는 일이다.
누군가 죽었다면 남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라도 이름이 불릴 수 있다. 묘비에 이름이 새겨지고, 제삿날 한 번이라도 불릴 수 있다.
호명되지 못했다는 것은 존재했던 사람의 생애가 역사 바깥으로 밀려났다는 뜻이다.
김유조 시인은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을 시 안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적지 않았으면서도, 역설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더 크게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죽은 자들을 위한 작은 초혼이기도 하다.
벽은 말하지 않는다.
시인은
“벽은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라고 쓴다.
참으로 절제된 문장이다.
벽이 울었다거나 피를 흘렸다고 과장하지 않는다. 건물에 억지로 감정을 덧씌우지 않는다.
침묵하게 둔다.
그 침묵 때문에 독자는 더 많은 것을 듣게 된다.
문학에서 가장 깊은 비명은 때로 소리가 없다.
외침이 너무 크면 귀가 먼저 듣지만, 침묵이 깊으면 마음이 듣는다.
김유조 시의 힘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팔십의 시인이 바라보는 분단은 젊은 세대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분단과 같을 수 없다.
그에게 해방과 전쟁과 이념의 충돌은 먼 역사책 속 활자가 아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자신의 생과 함께 늙어온 시간이다.
철원이라는 공간은 더욱 그러하다.
남과 북이 서로를 겨누었던 땅.
한때 사람이 살고 장터가 열리고 기차가 지나갔을 땅이 철책과 지뢰와 군사시설의 언어로 바뀌어버린 곳.
그곳에 남은 노동당사는 분단이 세워놓은 거대한 문장부호와 같다.
마침표도 아니다.
쉼표도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닫을 수 없는, 거대한 미완의 괄호에 가깝다.
시인은 그 괄호 안을 바라본다.
“중수를 기다리는 손길 아래 숨을 고르고” 있다는 표현도 의미심장하다.
건물을 고치는 것은 벽돌과 콘크리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허물어진 건물을 다시 세우듯, 갈라진 역사도 다시 이어질 수 있는가.
균열 난 벽을 보수하듯, 남과 북 사이에 깊게 갈라진 마음의 틈도 메울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작품의 밑바닥을 흐른다.
여든의 시인이 통일을 염원한다는 것은 젊은 날의 정치적 구호와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자신의 남은 생애 안에 반드시 통일을 보겠다는 조급한 선언이라기보다, 다음 세대에게까지 이 상처를 유산으로 넘겨주고 싶지 않다는 늙은 세대의 간절함에 가깝다.
한 시대를 오래 살아본 사람에게 전쟁은 영웅담이 아니다.
총성이 멎은 뒤 남겨지는 것은 결국 사람의 빈자리라는 사실을 생의 경험이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마지막 부분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남아 있다고”
이 대목에서 시는 철원 노동당사를 넘어 인간의 기억 전체로 확장된다.
빈방이 반드시 빈 것은 아니다.
먼저 떠난 사람이 살던 방에는 그 사람의 부재가 가득하다.
폐교의 운동장에는 사라진 아이들의 함성이 남아 있고, 오래된 역에는 떠난 사람과 기다렸던 사람의 시간이 남아 있다.
분단된 국토 또한 그러하다.
철책 사이의 빈 땅은 아무것도 없는 땅이 아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고향이 있고, 만나지 못한 가족의 이름이 있으며, 아직 건너지 못한 마음들이 겹겹이 누워 있다.
김유조 시인은 바로 그 ‘빈 것의 충만’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제목 「빈 지하의 목소리」 는 역설의 힘을 얻는다.
빈데 목소리가 있다.
사람이 없는데 웅성거린다.
닫혀 있는데 시간이 드나든다.
말하지 않는데 들린다.
이러한 상반된 이미지들이 작품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분단이라는 현실의 모순을 형상화한다.
한 민족인데 갈라져 있고,
같은 말을 쓰면서 만나지 못하며,
불과 지척의 땅을 두고 수십 년을 돌아가야 했던 한반도의 비극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역설이 아니었던가.
작품의 마지막,
“빈 지하는 웅성거리고 있다”
는 문장은 시 전체를 다시 처음으로 돌려보낸다.
처음에는 닫힌 문이 있었다.
마지막에는 웅성거리는 지하가 남는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으나 목소리까지 가둘 수는 없다.
여기에 이 작품의 통일 염원이 숨어 있다.
통일이라는 단어를 크게 쓰지 않아도 통일이 들린다.
철책을 걷자고 외치지 않아도, 닫힌 문 앞에서 오래 서 있는 시인의 마음 자체가 이미 하나의 기도다.
김유조 시인에게 통일은 영토를 붙이는 행정적 사건만은 아닐 것이다.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을 다시 역사 속으로 불러들이는 일,
미워해야 한다고 배웠던 얼굴에서 다시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는 일,
반세기 넘도록 잠긴 문을 열고 서로의 오래된 상처를 바라보는 일,
그것이 통일의 첫걸음일 것이다.
철원 노동당사는 아직 서 있다.
총탄 자국과 균열을 몸에 지닌 채 세월의 바람을 맞고 있다.
그 건물 앞에 여든의 시인 한 사람이 서 있다.
젊은 날의 패기도,
정치적 구호도 내려놓은 나이.
그의 귀에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가 들린다.
땅 아래 묻힌 이름들의 숨결,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발자국,
만나지 못한 가족들의 오래된 울음.
그 모든 것이 지하에서 올라와 늙은 시인의 가슴을 두드린다.
시인은 그 소리를 시 한 편에 받아 적었다.
그리하여 「빈 지하의 목소리」 는 폐허를 노래한 시에 머물지 않는다.
분단을 살아낸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낮은 유언이 된다.
미움을 물려주지 말 것.
상처를 잊지는 말되 복수의 언어로 기억하지 말 것.
닫힌 문을 영원히 닫힌 채 두지 말 것.
언젠가는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불러줄 것.
팔십의 시인이 바라보는 통일은 어쩌면 거창한 깃발이 아니다.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 하나가 열리고,
남쪽에서 걸어온 사람과 북쪽에서 걸어온 사람이 그 문턱에서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같은 말로
“많이 늦었습니다.”
한마디 건네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날이 온다면 철원 노동당사의 지하는 더 이상 비명의 방으로만 남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장소,
분단을 증언하되 화해를 가르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김유조 시인의 「빈 지하의 목소리」 는 바로 그날을 향해 귀를 열어놓은 시다.
폐허의 벽보다 오래 남는 것은 사람의 기억이고,
철책보다 멀리 가는 것은 사람의 그리움이다.
여든의 생애가 그 앞에서 한 편의 시가 되었을 때,
빈 지하에서 올라온 목소리는 마침내 한반도 전체를 향한 한 문장으로 바뀐다.
갈라진 것은 땅이었으나,
끝내 이어져야 할 것은 사람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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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조 시인 선생님께
― 「빈 지하의 목소리」 를 읽고
선생님의 「빈 지하의 목소리」 를 읽고 오래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저는 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세대입니다. 포성이 하늘을 찢던 밤도, 가족과 생이별한 채 고향을 등져야 했던 피란길도, 철조망 너머에 두고 온 사람의 이름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던 세대의 절절함도 몸으로 겪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전쟁은 오랫동안 역사책의 연도와 지도 위의 선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시를 읽으며 그 선이 종이에서 일어나 사람의 가슴 한복판을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철원 노동당사의 닫힌 문, 내려갈 수 없는 지하, 발자국 대신 계단을 메운 침묵.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한 사람들의 숨결,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발자국, 가족의 품으로 끝내 돌아가지 못한 생의 마지막 체온이 벽의 균열마다 스며 있는 듯했습니다.
특히
“비어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남아 있다”
는 시적 사유 앞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비어 있음이 이토록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의 시가 보여주었습니다.
폐허는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기억이 빠져나가지 못한 방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여든이라는 연륜을 단순한 나이의 숫자로 바라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반도의 굴곡진 시간을 오래 바라본 눈의 깊이이며, 전쟁의 상처가 아직 이 땅에서 완전히 아물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한 시인의 긴 호흡이라 여깁니다.
선생님의 시에는 통일이라는 단어가 큰 깃발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작품 전체에서 통일을 향한 간절함이 들립니다.
그 통일은 정치적 구호보다 훨씬 따뜻합니다.
사람이 다시 사람을 만나는 일,
헤어진 가족이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
미워하도록 강요받았던 얼굴에서 다시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는 일,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열어 남과 북이 서로의 상처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시에서 그런 통일을 읽었습니다.
전쟁을 겪지 못한 후세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은 많은 것을 지웁니다.
총탄 자국도 흐려지고, 무너진 건물도 언젠가는 복원됩니다.
그럼에도 기억까지 사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억은 미움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비극을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 필요합니다.
선생님의 시는 바로 그 기억을 다음 세대로 건네는 작은 등불이라 생각합니다.
역사는 책에도 기록되지만 때로는 한 사람의 주름에 더 깊게 기록됩니다.
책에는 연도가 남고, 사람에게는 그해의 추위가 남습니다.
책에는 전쟁이라는 두 글자가 적히지만, 사람에게는 돌아오지 못한 얼굴 하나가 평생 남습니다.
그 차이를 저는 선생님의 시 앞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선생님.
전쟁을 겪지 못한 제가 그 시대의 아픔을 다 이해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귀 기울이겠습니다.
선생님 세대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오래 듣고, 남겨주신 시를 귀하게 읽겠습니다.
기억하되 증오하지 않고,
아픔을 잊지 않되 다시는 같은 아픔을 만들지 않으며,
끝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세상을 바라겠습니다.
문학은 때로 시대와 시대 사이에 다리를 놓습니다.
한쪽에는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이 서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 시대를 만나는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 사이를 건널 수 있도록 문장 하나가 몸을 낮춥니다.
선생님의 「빈 지하의 목소리」 가 제게는 그런 다리였습니다.
저는 그 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며 선생님 세대가 지나온 시간 가까이에 잠시 서보았습니다.
그곳에서 거창한 이념보다 먼저 사람을 보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사람,
가족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고 싶었던 사람,
죽기 전에 고향 산천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싶었던 사람.
전쟁이 끝내 파괴하는 것은 국경선만이 아니라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였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통일 염원이 더욱 귀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통일은 지도를 붙이는 일이기 전에 사람의 끊어진 시간을 잇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철원의 닫힌 문들이 모두 열리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남쪽에서 걸어온 사람과 북쪽에서 걸어온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평범하게 인사를 나누는 날,
철조망 너머의 산이 더 이상 금단의 풍경이 아닌 날,
아이들이 ‘분단’이라는 말을 아주 오래된 역사책 속에서만 만나게 되는 날.
그날이 온다면 선생님의 시도 다시 읽힐 것입니다.
그때의 독자들은 한 여든 시인이 폐허 앞에 서서 얼마나 오래 평화를 기다렸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빈 지하의 목소리」 를 통해 남겨주신 것은 한 편의 시만이 아니었습니다.
기억을 잃지 말라는 당부이며,
미움을 대물림하지 말라는 마음이며,
끝내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오래된 염원이었습니다.
그 귀한 마음 앞에 전쟁을 겪지 못한 후세의 한 사람으로서 삼가 고개 숙입니다.
선생님의 시는 빈 지하에서 출발했으나 제 마음에는 문 하나를 열어놓았습니다.
기억의 문,
평화의 문,
화해의 문입니다.
그 문이 실제 한반도의 땅에서도 활짝 열리는 날까지 오래 건강하시어, 우리 곁에서 시대의 기억과 사람의 온기를 시로 밝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귀한 작품을 읽게 해주심에 깊은 감사와 존경을 올립니다.
2026, 8, 9
청람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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