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돌아가는 길이 한 인간의 생애가 될 때 ―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 「오디세이(Odyssey)」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돌아가는 길이 한 인간의 생애가 될 때 ―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 「오디세이(Odyssey)」 2026.08.14
돌아가는 길이 한 인간의 생애가 될 때 ―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 「오디세이(Odyssey)」

오디세이(Odyssey)

青民 박철언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트로이 전쟁보다 험하고 길었다.

부하들과 함께

검푸른 바다를 십 년이나 떠돌았다.

동굴에 갇힌 밤, 외눈박이 거인을 피해

어둠의 문을 빠져나왔고,

마음을 홀리는 세이렌의 노래 앞에서는

돛대에 몸을 묶은 채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견뎌야 했다.

폭풍도 유혹도

그의 마음속 이타카를 지우지 못했다.

베틀을 짜며 기다린 아내 페넬로페처럼

돌아가야 할 집이 있었기에

희망은 어둠을 밝히는 새벽이 되어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거지의 모습으로 이타카에 돌아와

활을 들어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긴 귀환의 끝에 섰다.

전쟁의 승리보다 귀한 것은

돌아갈 집하나,

마주 잡을 손 하나였다.

사람에게 가장 먼 길은

결국, 돌아가야 할 본향의 길.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 는

그 오래된 귀환의 진리를

오늘까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돌아가는 길이 한 인간의 생애가 될 때

― 청민 박철언 시인의 시 「오디세이(Odyssey)」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바다는 사람을 멀리 데려가지만, 끝내 한 사람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박철언 시인의 「오디세이(Odyssey)」 를 읽으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의 장대한 모험이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흔들리는 것은 ‘귀환’이라는 인간의 오래된 본능이다. 이 작품에서 이타카는 지중해 한가운데 놓인 섬의 이름을 넘어선다. 사람이 수많은 전쟁과 유혹, 실패와 고독을 지나 마지막에 다시 찾아가야 할 정신의 본적지다.

박철언 시인은 호메로스의 대서사를 장황하게 되풀이하지 않는다. 외눈박이 거인, 세이렌의 노래, 폭풍, 페넬로페, 활과 구혼자라는 몇 개의 상징만 골라 한 인간의 생을 압축한다. 이 압축의 방식에는 긴 세월을 건너온 원로 시인의 손끝이 배어 있다.

젊은 시인은 사건을 확대하려 하고, 세월을 통과한 시인은 사건 뒤에 남는 것을 바라본다.

「오디세이」가 귀환 서사이면서 동시에 노년의 시처럼 읽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전쟁의 승리보다 귀한 것은

돌아갈 집 하나,

마주 잡을 손 하나였다.”

이 세 행은 작품 전체의 척추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에게서 칼을 내려놓게 하고, 승리와 명예의 갑옷을 벗긴 뒤 한 사람의 남편이자 귀향객으로 돌려세운다. 영웅의 크기는 전쟁터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전쟁을 마친 뒤 어느 문 앞에 서는가에 의해 다시 측정된다.

이에 박철언 시인의 「오디세이」 는 단순한 고전 해설시를 벗어난다.

시인의 생애를 겹쳐 놓으면 작품의 울림은 한층 깊어진다. 공직과 법조의 길을 거쳐 우리 현대사의 굴곡진 현장을 통과해 온 한 사람이 여덟 번째 시집에 이르러 오디세우스를 불러낸다는 사실은 가볍지 않다. 권력과 제도, 명예와 부침의 언어를 가까이에서 경험한 사람이 세월의 끝자락에서 선택한 핵심어가 ‘승리’가 아니라 ‘귀환’이라는 데 이 시의 또 다른 무게가 놓인다.

젊은 날의 오디세이는 바깥으로 나아간다.

늙어가는 오디세이는 안으로 돌아온다.

인간의 전반생이 세계를 얻기 위한 항해라면, 후반생은 세계를 내려놓고 자신의 이타카를 찾아가는 항해인지도 모른다. 직함도, 명예도, 정치적 성취도 어느 순간에는 항구에 묶어두어야 할 배가 된다. 마지막까지 품고 갈 수 있는 것은 몇 사람의 얼굴과 한 채의 집, 자신을 기다려 준 손의 온기일 가능성이 크다.

박철언 시인은 이를 거창한 철학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베틀을 짜며 기다린 아내 페넬로페”를 한 장면으로 세운다.

베틀은 이 시에서 매우 중요한 사물이다.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시간을 견디는 동안 페넬로페는 방 안에서 시간을 짠다. 한쪽에는 파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실이 있다. 한 사람은 떠돌면서 귀환을 지키고, 한 사람은 기다리면서 사랑을 지킨다.

바다의 십 년과 베틀의 십 년.

그 두 시간이 마침내 한 집의 문턱에서 만난다.

여기에 박철언 시의 따뜻한 인간주의가 있다.

그의 오디세우스는 승전 영웅으로 귀환하지 않는다.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이 설정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이 씌워준 옷을 모두 벗고 나면 인간은 빈손의 귀향객에 가깝다. 많이 가진 자도, 높은 자리에 올랐던 자도 마지막 문턱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왕관이 아니다.

문을 열어 줄 사람이다.

이 시의 미학은 화려한 언어에서 나오지 않는다. 담담함 속에 있다. 문장은 평이하고 서사는 익숙하다. 그럼에도 오래 남는 까닭은 고전의 이야기가 시인의 생애와 만나면서 다른 체온을 얻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작품을 고전에서 현재로 옮겨 놓는다.

“사람에게 가장 먼 길은

결국, 돌아가야 할 본향의 길.”

여기서 ‘본향’은 고향보다 넓다.

태어난 마을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으며, 젊은 날 품었던 첫 마음일 수도 있다. 더 깊게 읽으면 인간이 본래 지녔으나 세상의 소음 속에서 잃어버린 순정한 정신의 자리일 수도 있다.

사람은 멀리 가는 것으로 인생을 증명하려 한다. 더 높은 자리, 더 큰 이름, 더 많은 성취를 향해 배를 띄운다. 그 항해가 길어질수록 어느 날 이상한 역설과 마주한다.

가장 멀리 가 본 사람이 가장 절실하게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역설이다.

박철언 시인의 「오디세이」 는 바로 그 역설의 바다 위에 놓여 있다.

세이렌은 단지 신화 속 괴물이 아니다. 한 생애 동안 사람을 본향에서 멀어지게 하는 수많은 유혹의 다른 이름이다. 권력일 수도 있고 욕망일 수도 있으며 명예와 자존, 미련과 집착일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자신의 몸을 묶었던 까닭은 귀가 약해서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돛대는 의지의 기둥이다.

삶에는 스스로를 묶어두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는 바다가 있다.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만이 자유가 아니다. 무엇을 위해 자신을 붙들어 두어야 하는가를 선택하는 일 역시 자유의 깊은 형식이다.

박철언 시인이 제8시집에 이르러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노래했다는 사실은 한 원로 시인의 시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초기의 시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었다면, 만년의 시는 세계를 지나 다시 사람에게 돌아오는 언어가 된다.

정치의 언어는 사람을 편으로 나누기 쉽고, 법의 언어는 옳고 그름을 가르며, 역사의 언어는 승패를 기록한다.

시는 그 모든 구분이 끝난 자리에서 한 사람의 손을 바라본다.

「오디세이」의 마지막에 남는 것도 바로 그 손이다.

전쟁도 사라지고, 괴물도 사라지며, 폭풍도 잠잠해진다.

끝내 남는 것은

돌아갈 집 하나.

마주 잡을 손 하나.

박철언 시인의 「오디세이」 는 영웅의 서사처럼 출발해 인간의 서정으로 돌아오는 작품이다. 크고 장대한 신화의 배를 띄워 놓고, 마지막에는 아주 작은 인간의 문 앞에 닻을 내린다.

그 점이 아름답다.

세상을 오래 건너온 시인의 언어가 마지막에 커지는 대신 낮아지고, 화려해지는 대신 단순해지며, 승리를 노래하는 대신 귀환을 말한다.

삶의 깊이는 얼마나 멀리 갔는가에만 있지 않다.

그 먼 항해를 끝낸 뒤

무엇을 버리고,

누구에게 돌아가며,

어느 문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다시 찾는가에 있다.

박철언 시인의 「오디세이」 는 그 오래된 질문을 푸른 바다 위에 다시 띄운다.

그 배에는 이제 칼보다 그리움이 많이 실려 있다.

그리고 그 배가 향하는 곳은

트로이도, 권력도, 영광도 아니다.

한 사람이 가장 사람다워지는 자리,

이타카라는 이름의 본향이다.

청민 박철언 시인님께

시인님의 시를 읽을 때마다 세월이 반드시 사람의 문장을 늙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문장은 세월을 먹고 빛을 잃지만, 어떤 문장은 세월을 오래 품을수록 더 깊은 향기를 냅니다. 시인님의 시편에서는 후자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공직과 법조의 길을 지나오시며 한 시대의 중심에서 수많은 풍경을 마주하셨을 터인데, 그 긴 생의 여정 뒤에도 시를 향한 마음은 조금도 식지 않은 듯합니다.

외려 세월이 더해질수록 시심의 불꽃은 더욱 맑고 깊게 타오르는 듯하여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특히 제8시집에 이르기까지 지칠 줄 모르고 시의 밭을 일구시는 모습은 참으로 귀합니다. 시 한 편을 세상에 내놓는 일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한 단어를 고르고, 한 행을 세우고, 마음속에서 오래 삭힌 생각을 몇 줄의 언어로 옮겨놓는 일에는 보이지 않는 고독과 인내가 따릅니다.

그 일을 한두 번이 아니라 평생 이어오셨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님의 시 「오디세이」 를 읽으며 더욱 그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젊은 날의 영웅담을 다시 들려주기보다, 긴 항해 끝에 사람이 돌아가야 할 본향을 바라보시는 시선에서 한 원로 시인의 깊이를 느꼈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을 경험한 뒤에도 끝내 귀하게 남는 것은 ‘돌아갈 집 하나, 마주 잡을 손 하나’라는 말씀 앞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큰 세계를 지나온 분의 언어가 오히려 작은 것의 귀함을 말할 때, 그 문장은 더 크게 울립니다.

명예보다 사람을, 승리보다 귀환을, 화려함보다 본향의 따뜻함을 바라보시는 시심에서 시인님의 삶이 지나온 시간까지 함께 읽히는 듯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직도 시를 향한 열정이 청년처럼 뜨겁다는 점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이미 이룬 것을 바라보기 쉽고,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는 데 마음을 두기 마련입니다. 시인님께서는 여전히 새로운 시를 쓰시고, 새로운 사유의 문을 여시며, 언어의 길 위에 다시 발을 내딛고 계십니다.

그 모습은 후배 문인들에게 말없는 가르침이 됩니다.

문학에는 정년이 없다는 것, 시심에는 노년이 없다는 것, 살아 있는 동안 마음의 불씨를 지키는 사람이 끝내 젊은 시인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고 계십니다.

저 또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시인님의 쉼 없는 필력 앞에 제 문장을 돌아보게 됩니다. 많이 쓰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마음이 마르지 않는 일이 얼마나 귀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시인님의 붓끝에는 아직 건너야 할 바다가 남아 있고, 만나야 할 시어가 남아 있으며, 독자의 가슴에 닿아야 할 많은 문장이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부디 지금의 맑은 시심 오래 간직하시어 앞으로도 시대의 소음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귀한 시편을 많이 남겨주시기를 소망합니다.

한 편의 시가 한 사람의 마음을 밝히고, 한 권의 시집이 한 시대의 기억을 품듯, 시인님의 남은 문학 여정 또한 더욱 깊고 아름다운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멀리서나마 후학의 마음으로 깊은 존경과 경의를 올립니다.

청람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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