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말복의 문턱에서, 한 생의 여름을 읽다 ― 김유조 시인의 「말복을 보내며」 에 부쳐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말복의 문턱에서, 한 생의 여름을 읽다 ― 김유조 시인의 「말복을 보내며」 에 부쳐 2026.08.15
말복의 문턱에서, 한 생의 여름을 읽다 ― 김유조 시인의 「말복을 보내며」 에 부쳐

말복을 보내며

시인 김유조

숨은 바람 겨우 한줌인데

땡볕을 밀어내고 세월의 등을 치니

벌써 가슴이 철렁하네

이날이면 밀린 방학 숙제와

못다 쓴 일기장이 그랬듯

지난 여름 흘린 땀은 헛된 증발이 아니라

뜨거운 햇살을 견뎌낸 증표이고

말복은 무슨 끝이 아니라

뜨거웠던 날들의 뜸 들이는 때

바람 한 줌에 흔들린 마음

오늘 한 줄 빈 여백에 쓰자

살아온 날은 흔적이 아니라

삶의 뿌리였다고

말복의 문턱에서, 한 생의 여름을 읽다

― 김유조 시인의 「말복을 보내며」 에 부쳐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여름의 끝에는

늘 작은 심장이 하나 숨어 있다.

김유조 시인의 「말복을 보내며」 를 읽으면 먼저 계절이 보이지 않는다. 계절을 지나온 사람의 등이 보인다. 한여름의 땡볕을 정면으로 견딘 뒤, 어느새 서늘한 바람 한 줌에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는 한 노시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첫 행의

“숨은 바람 겨우 한줌인데”

라는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다.

바람은 본래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한 줌’이라 부른다. 무형의 것을 손바닥 안에 올려놓는 순간, 바람은 기상현상이 아니라 시간의 손길이 된다. 그 작은 바람이 “땡볕을 밀어내고 세월의 등을 친다.”

여기서 ‘세월의 등’은 이 시를 떠받치는 중요한 은유다.

시간에 등을 만들어 주었다.

세월이 한 사람처럼 앞서 걷고, 바람이 그 등을 툭 치는 순간 계절은 뒤를 돌아본다. 여름도 돌아보고 사람도 돌아본다. 그 짧은 동작 안에 한 계절의 끝과 한 생의 회고가 함께 겹쳐진다.

이어 등장하는 “밀린 방학 숙제”와 “못다 쓴 일기장”은 이 시를 지나치게 관념적인 노년의 사유로 흘러가지 않게 붙잡아 주는 매우 따뜻한 장치다.

원로 시인의 시간 안에서 갑자기 어린 소년 하나가 뛰어나온다.

말복 무렵이면 개학 날짜가 가까워지고, 하얗게 비어 있는 일기장이 죄처럼 남아 있던 시절. 밀린 숙제를 앞에 두고 가슴이 철렁하던 어린 날의 기억이 수십 년 세월을 건너 다시 현재의 가슴을 두드린다.

이 대목에서 김유조 시인의 시적 품격이 드러난다.

노년을 노년의 언어로만 쓰지 않는다.

팔십의 기억 속에 열 살의 아이를 불러내고, 오늘의 바람 속에 오래전 방학의 냄새를 섞어 놓는다. 사람의 생애를 직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여러 시간이 한 자리에 포개진 둥근 시간으로 바라본다.

그 때문에 이 시에는 나이를 먹는 슬픔보다 시간을 품는 넉넉함이 먼저 와 닿는다.

특히

“지난 여름 흘린 땀은 헛된 증발이 아니라

뜨거운 햇살을 견뎌낸 증표”

라는 구절은 이 작품의 중심축이다.

땀은 대개 사라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피부에서 맺혔다가 증발하면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시인은 바로 그 사라짐을 뒤집는다.

증발한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낸 증거가 된다.

참으로 김유조 시인다운 시선이다.

한평생 대학 강단에서 영문학을 연구하고, 특히 헤밍웨이 문학을 깊이 천착해 온 학자의 눈에는 삶 역시 한 편의 텍스트였을 것이다. 인간은 상처를 설명하기보다 견디며, 패배를 선언하기보다 다시 일어서며, 삶의 존엄은 화려한 말보다 버티는 힘 속에서 드러난다는 헤밍웨이적 인간상이 이 짧은 시의 뒷면에서도 희미하게 숨 쉬고 있다.

다만 김유조 시인의 시는 헤밍웨이를 닮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에게는 한국인의 계절 감각이 있다.

복날이 있고, 방학 숙제가 있으며, 뜸 들이는 시간이 있다.

특히

“말복은 무슨 끝이 아니라

뜨거웠던 날들의 뜸 들이는 때”

라는 표현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견 가운데 하나다.

‘뜸 들인다’는 말에는 한국인의 밥 냄새가 배어 있다.

불을 끈 뒤에도 밥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솥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마지막 익음을 완성한다.

시인은 말복을 바로 그런 시간으로 읽는다.

끝이 아니라 익음이다.

여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 계절 동안 견딘 것들이 사람 안에서 의미로 익어가는 시간이다.

이 표현 하나만으로도 노년을 바라보는 시인의 철학이 선명해진다.

늙음 역시 끝이 아닐 터이다.

젊은 날의 불길을 지나온 생이 비로소 자기 향기를 얻는 뜸의 시간일 수 있다. 빠르게 끓어오르는 젊음만이 생의 전부가 아니다. 불을 내려놓은 뒤 깊어지는 맛이 있다.

김유조 시인의 문학과 인품을 오래 생각하게 되는 대목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학문이 깊어질수록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깊어진 만큼 말의 부피를 줄이는 사람이 있다.

김유조 시인의 시에는 후자의 품격이 배어 있다.

영문학자로서 축적한 방대한 지식이 작품의 앞줄에 서지 않는다. 해박함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학문은 이미 문장 깊숙한 곳에서 체온으로 변해 있다.

오랜 연구가 지식의 훈장이 아니라 한 사람을 바라보는 눈의 온도가 된 것이다.

원로의 품격이란 아마 이런 데 있을 것이다.

많이 가진 것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래 쌓은 것을 짧은 문장 속에 숨길 줄 아는 힘.

그 절제가 외려 독자의 마음을 오래 붙든다.

마지막 연은 더욱 깊다.

“바람 한 줌에 흔들린 마음

오늘 한 줄 빈 여백에 쓰자”

여기서 시인은 삶 전체를 거창한 자서전으로 쓰려 하지 않는다.

고작 한 줄이다.

빈 여백 하나다.

그 작은 자리에

“살아온 날은 흔적이 아니라

삶의 뿌리였다고”

적는다.

‘흔적’과 ‘뿌리’의 차이는 크다.

흔적은 지나간 것의 자국이다.

뿌리는 지금도 살아 있는 힘이다.

지난날을 흔적으로 바라보면 과거가 되지만, 뿌리로 바라보면 현재를 떠받치는 생명이 된다.

이 두 단어 사이에 김유조 시인의 긴 생애가 놓여 있다.

강단의 시간도, 책상 앞의 밤도, 헤밍웨이를 읽던 수많은 계절도, 제자를 바라보던 눈길도, 시 한 줄을 고쳐 쓰던 손끝도 사라진 흔적이 아니다.

오늘의 그를 세워 놓은 뿌리다.

이 시가 아름다운 까닭은 말복을 말하면서 여름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계절을 통과하여 인간의 생으로 들어간다.

한 줌 바람에서 유년을 꺼내고, 흘린 땀에서 삶의 존엄을 발견하며, 뜸 들이는 솥에서 노년의 깊이를 읽는다.

김유조 시인의 시에는 큰 북소리가 없다.

작은 풍경 하나를 오래 울리는 종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그의 문학심은 학자의 책장에서만 익은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사람과 계절과 상실과 기다림을 통과하며 얻어진 것이다.

그 점에서 김유조 시인은 후학과 문인들에게 하나의 귀한 문학적 자세를 보여준다.

문학은 많이 아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오래 바라본 사람의 것일 수 있으며, 시는 큰 말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작은 것의 무게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 일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말복이 지나면 여름은 조금씩 뒷걸음질 친다.

매미의 울음도 낮아지고, 저녁 그늘은 한 뼘씩 길어진다.

그때 김유조 시인의 한 문장이 계절 끝에 남는다.

살아온 날은 흔적이 아니라 뿌리였다고.

그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한 원로 시인의 생이 보인다.

수많은 책을 읽고도 사람을 먼저 읽은 학자,

긴 세월을 살아오고도 어린 날의 방학 일기장을 가슴 한쪽에 남겨둔 시인,

삶의 뜨거움을 견딘 뒤 그것을 자랑이 아니라 한 줄 여백으로 돌려놓을 줄 아는 사람.

그런 문학인의 존재 자체가 이미 후배 문인들에게 한 편의 오래된 시다.

말복의 바람은 곧 지나갈 것이다.

다만 그 바람에 흔들려 나온 김유조 시인의 문장은 쉽게 지나가지 않을 듯하다.

한 계절의 끝에서 시작된 몇 줄의 시가 한 인간이 평생 품어 온 학문과 문학과 인품의 깊이를 오래도록 품고 있기 때문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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