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꽃등불 하나가 사람의 품격을 밝힐 때 ― 신계전 시인의「자주빛 사랑」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꽃등불 하나가 사람의 품격을 밝힐 때 ― 신계전 시인의「자주빛 사랑」 2026.08.17
꽃등불 하나가 사람의 품격을 밝힐 때 ― 신계전 시인의「자주빛 사랑」

자주빛 사랑

시인 신계전

바람 부는 풀숲에 숨어 핀 초롱꽃

누구를 기다려 고개 숙였나

너 또한 나를 닮아 세월을 잃어

시린 가슴 이슬 맺혔나

밤마다 꿈속으로 몰래 찾아와

속삭이는 그대 목소리

가슴을 파고드네 꽃을 피우네

그리움이 눈물 짓네

그대는 나의 봄 나는 그대의 꽃

자주빛 고운 사랑아

안개 짙은 새벽길 곱게 핀 초롱꽃

누구를 못 잊어 꽃등불 켰나

세월의 끝자락에 매달린 추억

너무나도 애절하구나

밤마다 꿈속으로 몰래 찾아와

속삭이는 그대 목소리

가슴을 파고드네 꽃을 피우네

그리움이 눈물 짓네

그대는 나의 봄 나는 그대의 꽃

자주빛 고운 사랑아

자주빛 고운 사랑아

꽃등불 하나가 사람의 품격을 밝힐 때

― 신계전 시인의 「자주빛 사랑」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어떤 꽃은

피어 있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인품을 닮는다.

신계전 시인의 「자주빛 사랑」 을 읽으면 초롱꽃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오래 머무는 것은 꽃이 아니다.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다.

바람 부는 풀숲에 숨어 피고, 고개를 숙이고, 이슬을 품고, 새벽 안개 속에서 작은 등불처럼 자신을 밝히는 초롱꽃.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끝내 제 빛을 잃지 않는 그 모습은 신계전 시인의 시정신과도 닮아 있다.

“바람 부는 풀숲에 숨어 핀 초롱꽃

누구를 기다려 고개 숙였나”

첫 장면부터 낮다.

꽃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풀숲에 숨어 있다. 고개까지 숙이고 있다.

여기에서 ‘숙임’은 패배가 아니다.

오래 살아온 사람이 지니게 되는 겸양이며,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는 자세다.

신계전 시인의 삶에서 느껴지는 맑은 심성과 곧은 마음 또한 이와 멀지 않다.

곧은 사람은 반드시 목소리가 큰 사람이 아니다.

도리어 자신의 삶으로 말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말과 행동 사이의 거리가 짧고, 사람 앞에서와 뒤에서의 모습이 다르지 않으며, 이익 앞에서도 기준을 함부로 옮기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의 시에는 불필요한 기교가 오래 머물기 어렵다.

「자주빛 사랑」 역시 복잡한 언어의 미로를 만들지 않는다.

사랑하고,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다시 기억한다.

그 오래된 인간의 감정을 초롱꽃 한 송이 속에 담아낸다.

“너 또한 나를 닮아 세월을 잃어

시린 가슴 이슬 맺혔나”

꽃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대목이다.

시인은 초롱꽃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자기 생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꽃잎에 맺힌 이슬은 자연현상에 머물지 않는다.

오래 품어온 그리움이며, 말하지 못한 사랑이며, 세월이 지나도 마르지 않은 마음의 물방울이다.

원로의 사랑은 젊은 사랑과 다르다.

젊은 사랑이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사랑이라면, 오랜 세월을 지난 사랑은 지나온 시간을 품는 사랑에 가깝다.

많은 것이 사라진 뒤에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이름 하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인데 이상하게 더 선명해지는 얼굴 하나.

그것이 “세월의 끝자락에 매달린 추억”이라는 표현에 애잔하게 걸려 있다.

이 시에서 특히 아름다운 것은 ‘꽃등불’이라는 이미지다.

“누구를 못 잊어 꽃등불 켰나”

초롱꽃은 본래 아래를 향해 피어난다.

그 형태를 시인은 기다림의 등불로 바꿔 놓는다.

누군가 돌아올 길을 밝히는 불빛처럼, 잊지 못한 사람을 위해 밤새 켜둔 작은 등잔처럼 꽃이 서 있다.

사랑은 때로 이런 것이다.

상대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불을 끄지 않는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작은 불빛 하나 남겨두는 일.

그 불빛이 사랑의 미련인지, 신의인지, 추억인지 굳이 나눌 필요도 없다.

오래된 사랑에서는 그 모든 것이 한 빛깔로 섞인다.

그 빛이 이 시에서는 자주빛이다.

자주빛은 참 묘한 색이다.

붉음의 열정과 푸름의 고요가 섞여 있다.

젊은 날의 뜨거움만도 아니고, 노년의 평정만도 아니다.

뜨거운 시간을 건너온 사람이 품게 되는 깊은 색이다.

그 점에서 제목 「자주빛 사랑」 은 작품 전체를 잘 품는다.

특히 반복되는

“그대는 나의 봄 나는 그대의 꽃

자주빛 고운 사랑아”

라는 구절은 시의 정서를 하나의 선율로 묶어낸다.

문자로 읽어도 노래처럼 들린다.

‘그대는 봄’이고 ‘나는 꽃’이라는 관계 설정 또한 단순하면서도 따뜻하다.

꽃은 혼자 피지 않는다.

햇빛과 바람과 비와 계절이 있어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생애 뒤에는 반드시 그를 피어나게 한 누군가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으며, 문우일 수도 있고, 평생 가슴에 품어온 한 시대일 수도 있다.

신계전 시인의 시를 읽으며 더욱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이러한 서정의 밑바닥에 놓인 정신의 자세다.

신계전 시인은 문단의 원로로서 단지 오래 시를 써왔다는 이유만으로 어른이 된 분이 아니다.

맑은 심성, 곧은 마음, 깊은 성정, 정의로움을 삶 속에서 지켜왔기에 후배 문인들이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다.

그가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시 이전의 사람이다.

바른 정신이 있어야 바른 시가 나온다는 믿음이다.

이 생각은 오늘의 문단에서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문학은 얼마든지 아름다운 말을 만들 수 있다.

수사를 배울 수 있고, 기법을 익힐 수 있으며, 유행하는 표현을 따라갈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언어 뒤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가이다.

삶은 비뚤어져 있는데 문장만 반듯할 수 있을까.

타인을 업신여기면서 사랑을 노래하고, 불의를 외면하면서 정의를 쓰며, 명예를 탐하면서 순수를 말한다면 그 시의 뿌리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신계전 시인이 시류에 편승하는 문인들에게 때로 따끔한 말을 아끼지 않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꾸짖음은 권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삶에서 나온다.

자신이 먼저 지켜온 것을 후배들에게 권하기 때문에 말에 무게가 생긴다.

스스로 걷지 않은 길을 남에게 가르치는 것은 훈계에 머물지만, 평생 걸어온 길을 가리키는 것은 가르침이 된다.

신계전 시인의 곧음은 바로 그 차이를 보여준다.

「자주빛 사랑」 은 표면적으로는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시다.

그리움이 있고, 초롱꽃이 있고, 꿈속에서 찾아오는 목소리가 있으며, 눈물과 봄이 있다.

그 아래에는 신계전 시인 특유의 정신적 질서가 놓여 있다.

사랑을 가볍게 소비하지 않는 태도.

그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

오래된 정을 버리지 않는 의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는 품성.

그것들이 초롱꽃의 자주빛 속에 스며 있다.

좋은 시는 사람의 얼굴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신계전 시인의 시가 맑은 까닭은 그의 마음 한편에 아직 탁해지지 않은 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가 곧은 까닭은 삶에서 함부로 굽히지 않은 중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가 따뜻한 까닭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성정이 오래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품격은 시집의 권수로 완성되지 않는다.

등단 연도로도 정해지지 않는다.

얼마나 오랫동안 자기 정신을 지켜왔는가.

사람 앞에서 얼마나 한결같았는가.

말과 삶 사이에 얼마나 적은 거리를 두었는가.

그것이 한 시인의 문학적 연륜을 만든다.

신계전 시인의 초롱꽃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꽃은 작아 보이지 않는다.

낮게 피어 있을수록 빛은 더 선명하다.

밤이 깊을수록 꽃등불도 더 환하다.

아마 시인의 삶도 그러할 것이다.

자신을 높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사람.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후배들이 귀를 기울이는 사람.

시의 바름을 말하기 전에 삶으로 먼저 바름을 보여온 사람.

그러한 원로 한 분이 문단에 계시다는 것은 후배 문인들에게 작은 복이다.

「자주빛 사랑」 의 마지막 반복은 그래서 단순한 후렴으로 들리지 않는다.

“자주빛 고운 사랑아.”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부름이면서,

오래 지켜온 순수에 대한 부름이고,

시인이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바른 문학정신을 향한 부름처럼도 들린다.

초롱꽃 한 송이가 밤을 다 밝힐 수는 없다.

그럼에도 캄캄한 길에서 사람은 그 작은 불빛을 보고 방향을 잡는다.

문단의 원로도 그러하다.

한 사람이 모든 문학을 바로 세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평생 곧게 살아온 한 사람의 존재는 후배들에게 방향 하나를 남긴다.

신계전 시인의 자주빛 초롱꽃도 오늘 그 자리에서 작은 등불 하나를 켜고 있다.

시는 먼저 사람이 쓰고,

마침내 그 사람의 삶이

시를 완성한다. ㅡ청람

신계전 시인님께

선생님의 「자주빛 사랑」 을 읽으며 한 편의 시보다 먼저 한 사람의 품성을 오래 생각했습니다.

시 속의 초롱꽃처럼 선생님께서는 늘 자신을 낮추시면서도 문단의 한쪽을 환히 밝혀오셨습니다. 맑은 심성, 곧은 마음, 깊은 성정, 불의를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정의로움이 선생님의 삶과 시에 함께 배어 있습니다.

특히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바른 정신에서 바른 시가 나온다”는 뜻을 새삼 깊이 새기게 됩니다.

시는 몇 줄의 아름다운 문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을 쓰는 사람의 삶과 태도까지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시류에 쉽게 흔들리거나 문학을 이름과 명예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모습을 보실 때 따끔하게 일깨우시는 것도 결국 후배 문인들이 문학의 본래 자리를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씀에 힘이 있는 까닭은 선생님께서 먼저 그렇게 살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걷지 않은 길을 남에게 권하는 말은 오래 남지 않지만, 평생 스스로 지켜온 삶에서 나오는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선생님의 말씀 앞에서 후배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도 연륜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삶과 문학 사이의 거리를 좁혀오신 한 문인의 오랜 실천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주빛 사랑」의 초롱꽃을 바라보면서도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고개를 숙였으되 결코 작지 않고, 풀숲에 숨어 있으되 제 빛을 잃지 않는 꽃.

밤이 깊어질수록 작은 꽃등불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선생님께서 문단에서 지켜오신 자리도 그와 닮아 있습니다. 앞에 서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뒤에서 후배들의 문학을 살피시고, 잘못된 길에는 꾸짖음을 아끼지 않으시며, 좋은 글과 좋은 사람에게는 따뜻한 격려를 건네시는 모습에서 참된 원로의 품격을 배웁니다.

문단에는 시를 잘 쓰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시를 쓰는 사람이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어른이 더욱 필요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바로 그 귀한 자리를 지켜오셨습니다.

저 또한 선생님의 글과 말씀을 대할 때마다 문학 이전에 사람됨을 돌아보게 됩니다. 문장이 반듯하려면 마음부터 반듯해야 하고, 좋은 시를 쓰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써야 한다는 평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가르침을 다시 마음에 담게 됩니다.

부디 오래도록 건강하시어 지금처럼 후배 문인들의 든든한 어른으로 곁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의 자주빛 초롱꽃이 앞으로도 오래 피어, 문단의 어두운 길목마다 작은 꽃등불이 되어주기를 소망합니다.

늘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올립니다.

청람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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