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 날 ― 주광일 「여름 엽서 46」 를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 날 ― 주광일 「여름 엽서 46」 를 읽다 2026.08.18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 날 ― 주광일 「여름 엽서 46」 를 읽다

여름 엽서 46

시인 주광일

혼탁한 여름, 대지 위에서 벌어지는 세상 일에 무심한 듯 침묵을 지켜오던 하늘이, 끝내 분노한 나머지 시커먼 구름의 등을 떠미는 순간,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낙비.

순식간에 불어난 빗물이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이곳 저곳 널려있는 더러운 쓰레기들을 속 시원히 휩쓸어 버리네.

2026.8.17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 날

― 주광일 「여름 엽서 46」 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하늘에도

참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주광일 시인의 「여름 엽서 46」 에서 하늘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푸르게 열려 있는 자연의 배경도 아니다. 인간 세상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끝내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검은 구름의 등을 떠미는 거대한 양심이다.

“혼탁한 여름”

시의 첫머리에 놓인 이 말은 단순히 무덥고 습한 계절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 ‘혼탁’은 기후의 상태가 아니라 시대의 얼굴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기 어려운 세상, 말은 넘쳐나되 책임은 희미해지고, 욕망은 커지되 부끄러움은 작아진 현실을 시인은 여름이라는 계절 속에 밀어 넣는다.

그 앞에서

하늘은 한동안 침묵한다.

이 침묵이

중요하다.

주광일 시인이 그려낸 하늘은 성급하게 심판하지 않는다. 오래 바라보고, 오래 견디고, 오래 참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커먼 구름의 등을 떠미는”

것이다.

참으로

힘 있는 표현이다.

구름이 저절로 몰려오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등을 떠민다. 마치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이제는 무엇인가 씻어내야 한다는 듯 검은 구름을 세상 쪽으로 밀어 보낸다.

그 순간

쏟아지는 소낙비는 더 이상 비가 아니다.

시인의 절규이며

하늘의 포효이고

시대의 더러움을 씻어내려는 거대한 물의 회초리다.

평생 법조인의 길을 걸으며 청렴을 삶의 중심에 두었던 주광일 시인이기에 이 짧은 작품의 무게는 더욱 묵직하다.

법은 본래 인간이 인간답게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세운 최소한의 둑이다. 법조인은 그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 길을 한평생 걸어온 노시인의 눈에 작금의 현실이 얼마나 답답하게 비쳤을까.

그 답답함이 장문의 격문으로 나오지 않는다.

고작

소낙비

한 줄기다.

그런데

그 한 줄기가

웬만한 웅변보다 세다.

시인은 직접 누구를 꾸짖지 않는다. 특정한 사람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다. 하늘과 구름과 비와 쓰레기를 데려와 시대를 말한다.

이것이

시의 힘이다.

산문이었다면 분노라고 불렸을 것이

시가 되었기에 자연의 섭리가 된다.

특히

“더러운 쓰레기들을 속 시원히 휩쓸어 버리네”

라는 마지막 장면은 단순한 청소의 풍경을 넘어선다.

여기서 쓰레기는 거리의 폐기물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가 버리지 못하고 쌓아온 탐욕, 위선, 거짓, 무책임의 은유로 읽힌다.

빗물이

그것들을 한꺼번에 휩쓸고 간다.

사람의 손으로 치우지 못한 것을

하늘이 나서서 쓸어버린다.

이 장면에서 노 시인의 분노보다 슬픔을 먼저 본다.

정말 미워서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는 오래가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절규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늙어서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주광일 시인의

포효 역시 그러하다.

세상이 미워서가 아니라

세상이 이대로 더럽혀지는 것을 차마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평생 법과 원칙을 가까이했던 사람이라면, 노년의 시인은 이제 법전 대신 하늘을 펼쳐놓고 시대를 읽는다.

條文대신 구름을 읽고,

판결문 대신 빗줄기를 쓰며,

법봉 대신 천둥을 들려준다.

그 모습이

사뭇

장엄하다.

노 시인이 하늘을 향해 절규하자

하늘이 마침내 답한다.

말로

답하지 않는다.

검은 구름을 몰아오고

소낙비를 퍼붓는다.

그 비는

마치 오래 참아온 하늘이

끝내 피를 토해내는 것처럼 거세다.

주광일 시인의 절규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라 해도 좋겠다.

「여름 엽서 46」 은 짧다.

짧기에

더욱 매섭다.

엽서 한 장의 크기 안에 시대의 혼탁과 노시인의 분노, 청렴한 법조인이 지켜온 삶의 태도, 정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함께 들어 있다.

주광일 시인은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다.

세상이 흐리면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마저 침묵하면 시를 쓴다.

그것이

노시인이 시대와 싸우는 방식이다.

칼을 들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한 줄의 소낙비를 불러온다.

그 소낙비가

우리의 얼굴까지 흠뻑 적신다.

혹시 씻겨 내려가야 할 것이

거리의 쓰레기만은 아닐 것이다.

이 시를 읽는 우리 각자의 마음 한구석에도

오래 묵은 먼지 몇 점쯤은 붙어 있을 터이다.

주광일 시인의 여름 소낙비는

세상을 향한 꾸짖음이기 이전에

우리 모두에게 내리는 한 줄기 성찰의 비다.

비가 그친 뒤

하늘은

다시 맑아질 것이다.

시인은 아마

그 맑아진 하늘보다

사람의 마음이

조금 더 맑아진 세상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ㅡ청람

주광일 시인께 드리는 글

― 하늘도 끝내 침묵을 거두었습니다

주광일 시인님께.

선생님의 「여름 엽서 46」 을 읽고 있노라니, 그날 쏟아진 소낙비가 단순한 여름비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혼탁한 세상을 오래 내려다보던 하늘이 더는 견디지 못해 검은 구름의 등을 떠밀었고, 마침내 참았던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린 듯했습니다.

그 소낙비는 어쩌면

주광일 노시인의 절규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께서는 평생 법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길에서 지키고자 하신 것은 법조문 몇 줄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가려내고,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 앞에서 저울의 눈금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 사사로운 이해보다 공의를 앞세우는 것, 그것이 선생님께서 몸으로 지켜오신 법의 정신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嚴正公平.

엄정하되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되 원칙을 잃지 않는 삶.

그 네 글자가 선생님의 오랜 법조 인생을 바라보게 합니다.

또 하나의 말이 떠오릅니다.

破邪顯正.

그릇된 것을 깨뜨려 바른 것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선생님의 이번 시에는 바로 그 정신이 살아 있습니다.

악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대신 소낙비를 부르셨고, 혼탁한 현실을 장황하게 성토하는 대신 빗물이 쓰레기를 휩쓸어가는 한 장면을 세워놓으셨습니다.

세월이 깊어지면 분노마저 절제되는 것일까요.

젊은 분노가 천둥이라면 노시인의 분노는 먼 산에서 몰려오는 먹구름과 닮았습니다. 소리는 늦게 들리지만 한번 쏟아지기 시작하면 대지를 송두리째 적십니다.

선생님의 문장이 그렇습니다.

짧지만 무겁고,

담담하지만 서늘하며,

몇 줄 되지 않으면서도 시대의 폐부를 건드립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글에는 한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도덕적 무게가 있습니다.

청렴은 입으로 말하기는 쉽지만 한 생을 통해 증명하기는 어려운 덕목입니다.

권력 가까이에서 자신을 낮추고, 이해관계 앞에서 마음의 저울을 바로 세우며, 세월이 흘러도 처음 품었던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청백리의 오래된 정신을 떠올립니다.

청백리란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가져도 될 것과 가져서는 안 될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힘이 있어도 탐하지 않는 사람, 말로 정의를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정의의 증거로 남기는 사람 말입니다.

선생님의 시 한 편이 힘을 갖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시보다 먼저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평생의 삶이 문장 뒤에 서 있으니 소낙비 한 줄에도 무게가 실립니다.

하늘의 분노가 터져

소낙비가 내렸습니다.

그 비는 거리의 쓰레기만 쓸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탐욕과 위선, 거짓과 부끄러움까지 한꺼번에 씻어내고 싶은 노시인의 염원처럼 읽힙니다.

주광일 시인님.

선생님께서는 이제 법정의 언어가 아니라 시의 언어로 시대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법복을 벗은 자리에 시인의 옷을 입으셨으나, 그 안에 흐르는 정신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엄정공평의 저울은 아직 선생님의 가슴에 놓여 있고,

파사현정의 칼날은 이제 시어가 되었으며,

청백리의 맑은 정신은 한 줄의 빗물이 되어 세상을 적십니다.

그렇기에 「여름 엽서 46」 의 소낙비가 더욱 크게 들립니다.

하늘이 노시인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오래 참아온 한 사람의 절규를 듣고

마침내 구름을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대답했습니다.

천둥으로,

소낙비로,

세상을 씻어내는 거대한 물줄기로.

선생님의 글 앞에서 저 또한 제 마음의 저울부터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기에 앞서 내 안에 씻겨야 할 것은 없는지, 정의를 말하면서 스스로에게는 너그러웠던 것은 아닌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문장보다 먼저 삶을 바로 세우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좋은 시는 아름다운 말에 머물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양심을 불러 세웁니다.

선생님의 이번 여름 엽서가 바로 그런 시였습니다.

부디 오래도록 강건하시어

세상이 흐릴 때마다

맑은 정신의 빗줄기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嚴正公評의 법조인,

破邪顯正의 사도,

淸白吏의 정신을 삶으로 지켜오신

주광일 시인님께

깊은 존경의 마음을 올립니다.

한평생 맑게 살아온 사람의 한 줄은

때로 천 마디 웅변보다 더 큰 천둥이 됩니다.

청람 김왕식 삼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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