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삶의 서랍에서 들려오는 몽돌 소리 ― 신계전 시인의「빼다지」 읽다

삶의 서랍에서 들려오는 몽돌 소리 ― 신계전 시인의「빼다지」 읽다 2026.08.21
삶의 서랍에서 들려오는 몽돌 소리 ― 신계전 시인의「빼다지」 읽다

□ 신계전 원로 시인

빼다지

시인 신계전

남몰래 가슴속에 소중하게 지난 파문

살며시 귀기울여 눈감은 채 다가서면

몽돌이 구르는 소리 그 안에서 들린다

울어도 소용없는 지난 일은 묻어 두고

죽을 힘 다하도록 살아야 할 내일 앞에

용케도 버티어 왔다. 풍랑으로 키운 삶

막막한 갈피마다 수액처럼 적셔 주며

잠 못 든 목메임을 환청으로 달래 주는

촉촉한 고향 까마귀 그 안에서 눈뜬다

삶의 서랍에서 들려오는 몽돌 소리

― 신계전 시인의 「빼다지」 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람에게는 누구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는 서랍 하나쯤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버리지 못한 기억, 이미 끝났으나 끝내 끝나지 않은 상처, 이름을 부르면 아직도 가슴 한쪽이 젖는 사람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신계전 시인의 「빼다지」 는 바로 그 오래된 마음의 서랍을 여는 시다.

‘빼다지’라는 말부터 정겹고 깊다. 서랍이라는 반듯한 표준어보다 삶의 손때가 묻어 있다. 오래된 장롱 밑칸을 열 때 나는 나무 냄새가 있고, 어머니가 고이 접어 넣어둔 무명옷의 체온이 있으며, 함부로 버릴 수 없어 간직해온 한 생애의 흔적이 있다.

첫 수의

“남몰래 가슴속에 소중하게 지난 파문”

이라는 구절은 이 작품의 문을 여는 열쇠다.

삶은 지나간다고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기억은 파문이 되어 가슴 가장 안쪽에 남는다. 시인은 그 기억을 거창한 사건으로 불러내지 않는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그러자 들려오는 것이 ‘몽돌이 구르는 소리’다.

이 한 구절이 참 좋다.

몽돌은 오랜 세월 파도에 부딪히며 모서리를 잃은 돌이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살아가며 부딪히고 깨어지고 닳는다. 젊은 날 날카롭던 분노도 세월이라는 파도에 씻기고, 견딜 수 없던 슬픔마저 어느 날 둥근 기억이 된다. 신계전 시인의 몽돌은 풍경이 아니라 한 인간이 평생 견디어 얻은 마음의 형상이다.

둘째 수에 이르면 시의 결은 더욱 단단해진다.

“울어도 소용없는 지난 일은 묻어 두고

죽을 힘 다하도록 살아야 할 내일 앞에

용케도 버티어 왔다. 풍랑으로 키운 삶”

여기에는 과장된 비탄이 없다. 자신의 상처를 독자 앞에 전시하지도 않는다. ‘용케도 버티어 왔다’는 한마디에 긴 생애가 웅크리고 있다.

이것이 원로 시인의 언어다.

젊은 시가 상처를 외친다면, 오래 살아낸 사람의 시는 상처를 품는다. 눈물을 말하기보다 눈물 이후의 얼굴을 보여준다. 삶이 자신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보다 그 삶을 어떻게 견디었는가를 적는다.

특히 ‘풍랑으로 키운 삶’이라는 표현은 「빼다지」의 정신적 중심이라 할 만하다. 풍랑은 삶을 부수는 힘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키우는 힘이다. 고난을 낭만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고난에 무릎 꿇지 않은 인간의 품격을 짧은 한 구절에 세워놓았다.

마지막 수의 ‘촉촉한 고향 까마귀’ 또한 오래 남는다.

까마귀는 흔히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선택되는 새가 아니다. 신계전 시인은 굳이 까마귀를 불러온다. 그 선택 속에 시인의 미학이 있다. 번쩍이는 것을 좇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들판과 고향과 사람 냄새 속에서 시를 찾는다.

잠 못 드는 밤, 목메임을 달래주는 것도 화려한 음악이 아니라 고향의 까마귀 울음이다. 남들이 지나치는 소리 속에서 한 생애의 뿌리를 듣는 사람, 그것이 시인이다.

신계전 시인은 한국 문단에서 오랜 세월 시와 시조의 길을 걸어온 원로 문인이다. 수많은 문학적 성취와 수상 경력이 그의 시간을 증명한다.

허나 한 문인의 진정한 연륜은 이력서의 줄 수로만 헤아려지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남긴 온기다.

신계전 원로시인이 여러 문인들에게 스승으로 존경받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문학 앞에서 자신을 높이기보다 사람을 품고, 후배의 글 한 줄을 귀하게 여기며, 문단의 어른이되 권위로 서기보다 깊은 인품으로 자리를 지켜온 시간 말이다.

좋은 문인은 작품을 남긴다.

큰 문인은 사람을 남긴다.

신계전 시인의 「빼다지」 를 숙독하면, 한 편의 시보다 한 사람의 오래된 마음을 들여다본 듯하다.

그 마음의 서랍 안에는 울음도 있고 풍랑도 있고 고향도 있다. 신기하게도 그 모든 것이 이제 서로 싸우지 않는다.

오랜 세월 파도에 씻긴 몽돌처럼 나란히 누워 있다.

하여, 「빼다지」 는 과거를 회상하는 시에 머물지 않는다. 한 인간이 상처를 어떻게 품격으로 바꾸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픔을 지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으며, 풍랑을 지나고도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시다.

문단에

어른이 귀해지는 시대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많아도 사람의 등을 다독여주는 문인은 흔하지 않다. 자신의 이름보다 후배의 이름을 먼저 불러주는 사람, 문학의 높이보다 인간의 깊이를 먼저 헤아리는 사람은 더욱 귀하다.

신계전 원로시인의 시와 삶이 오래도록 귀하게 읽혀야 할 까닭이다.

그의 마음속 ‘빼다지’ 에는 한 사람의 추억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문단의 한 시대가 들어 있고,

풍랑을 견딘 시인의 체온이 들어 있으며,

후배 문인들이 오래도록 배워야 할

사람의 품격이 고이 접혀 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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