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계절은 먼저 날벌레의 높이를 낮춘다 ― 허형만 시인의 「처서處暑」 를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계절은 먼저 날벌레의 높이를 낮춘다 ― 허형만 시인의 「처서處暑」 를 읽다 2026.08.24
계절은 먼저 날벌레의 높이를 낮춘다 ― 허형만 시인의 「처서處暑」 를 읽다

□ 허형만 시인

처서 處暑

시인 허형만

날벌레 낮게 낮게 난다

순식간에 날이 흐리고

앞산 중턱 소나무

검은 구름에 갇혔다

푸드덕, 지상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소리가

세찬 바람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아졌구나

천상의 모든 생명들이

서둘러 흙으로 돌아오고 있구나

계절은 먼저 날벌레의 높이를 낮춘다

― 허형만 시인의 「처서處暑」 를 읽다

처서는

달력에 먼저 오는 것이 아니다

날벌레의 날개가 낮아지고

소나무의 어깨에 검은 구름이 걸리며

새들이 지상에서 한꺼번에 몸을 들어 올릴 때

계절은 이미 사람보다 먼저 제 갈 길을 알고 있다

허형만 시인의 「처서」 는 바로 그 미세한 기척에서 시작한다

이 시에는 가을을 알리는 상투적인 단풍도

서늘한 바람도

익숙한 낙엽의 감상도 없다

대신

낮게 나는 날벌레와

구름에 갇힌 소나무와

푸드덕 솟는 새들의 날갯짓이 있다

그 작은 움직임들이 한꺼번에 생의 방향을 바꾼다

계절의 변화는 어느 순간

한 인간의 남은 시간으로 건너가고

자연의 귀환은 곧 존재의 귀환이 된다

이 시에서

처서는 절기가 아니다

한 생이 자기 그림자의 길이를 처음 재어보는 시간이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 사이에 놓인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를

비로소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허형만 시인은 그 무거운 사실을

비장하게 외치지 않는다

낮은 날벌레 하나를 앞세운다

큰 진실을 작은 생명에게 맡기는 것

그것이 이 시의 깊이이며

오래 세월을 건너온 시인의 품격이다

「처서」 를 읽는 일은 가을을 읽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지를

계절에게 배우는 일이다

첫 행부터 낯설다.

“날벌레 낮게 낮게 난다”

가을이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람이 선선해졌다고도 하지 않는다.

날벌레의 비행 고도가 낮아졌다는 하나의 장면으로 계절의 문턱을 보여준다.

좋은 시인은 큰 사건을 크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변화를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다.

기상대보다 날벌레를 먼저 읽고, 달력보다 소나무의 어두워진 얼굴을 먼저 읽는다.

「처서」 의 첫머리는 그런 시인의 눈을 보여준다.

날이 흐려지고

앞산 중턱 소나무가 검은 구름에 갇히며

지상의 새들이 푸드덕 날아오른다.

하늘과 산과 나무와 새가 한꺼번에 움직인다.

그런데 이 자연의 소란은 단순한 기상 변화가 아니다.

시인은 세찬 바람을 따라 어느 순간 계절에서 생애로 건너간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아졌구나”

이 대목에서 「처서」 는 계절시의 옷을 벗고 생의 깊은 안쪽으로 들어간다.

처서는 여름이 죽는 날이 아니다.

뜨거웠던 시간이 스스로 몸을 낮추기 시작하는 절기다.

사람의 생도 그러하다.

젊은 날에는 앞으로 남은 시간이 뒤에 놓인 시간보다 길다.

어느 날부터 그 저울이 반대로 기운다.

지나온 길이 남은 길보다 길어지는 순간이 온다.

허형만 시인은 그 사실 앞에서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죽음을 비장하게 부르지도 않는다.

늙음을 서럽다고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저 한 문장으로 받아들인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아졌구나”

여기서 ‘구나’가 중요하다.

비명도 아니고 탄식도 아니다.

오래 산 사람이 저녁 무렵 마당에 나와 서쪽 하늘을 한번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내려놓는 어미다.

삶의 큰 진실은 때로 느낌표보다 ‘구나’에 더 오래 머문다.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은 더욱 깊다.

“천상의 모든 생명들이

서둘러 흙으로 돌아오고 있구나”

대개 사람은 죽음을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허형만 시인은 방향을 뒤집는다.

하늘의 생명들이 흙으로 돌아온다.

이 역전이 아름답다.

높아지는 것이 완성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 귀환이다.

생명의 마지막 주소가 구름 위가 아니라 흙 아래라는 이 시적 감각에는 오래 자연을 바라본 사람의 겸허가 있다.

꽃도 흙으로 돌아가고

새의 깃털도 흙으로 돌아가며

한 인간이 평생 움켜쥐었던 이름과 명예와 재산도 끝내 흙 앞에서는 높이를 낮춘다.

처서란 어쩌면 계절이 인간에게 보내는 작은 예행연습인지 모른다.

이제 조금 내려놓으라고.

너무 높이 날려고 애쓰지 말라고.

무성했던 잎도 내려놓고

뜨거웠던 햇빛도 한발 물러서며

생의 마지막 아름다움은 더 높이 오르는 데만 있지 않다고.

이에 허형만 시인의 「처서」 는 죽음을 노래한 시라기보다 잘 낮아지는 법을 보여주는 시에 가깝다.

시인 허형만을 한참 바라보게 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한국문단의 중심에서 오랜 세월 시를 쓰고 문학을 연구해 온 학자이며 원로시인이다.

후학에게는 스승으로 불릴 만한 연륜과 문학적 성취를 지녔다.

그런데 허형만이라는 이름의 무게는 작품 목록이나 문단 경력만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좋은 시 뒤에는 대개 좋은 눈이 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좋은 눈 뒤에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

문장은 인품을 완전히 속이지 못한다.

사람을 낮추어 보는 사람이 오래 겸손한 시를 쓰기 어렵고, 자기 이름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이 자연 앞에서 오래 몸을 낮추기도 어렵다.

허형만 시인의 시에는 무엇을 과시하려는 힘보다 무엇을 덜어내려는 힘이 자주 느껴진다.

그것은 문장의 기교 이전에 사람의 자세와 맞닿아 있다.

하여

허형만 시인에게는

시가 사람 앞에 서기보다 사람이 시보다 반걸음 먼저 서 있는 품격이 있다.

좋은 시인이기 이전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문학의 명제를 말로 주장하지 않고 삶으로 천천히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세상에는 시가 사람보다 앞서 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작품은 높이 올라갔는데 사람이 그 높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문학적 명성은 커졌지만 타인의 작은 마음을 받아줄 그릇은 외려 작아지는 경우도 있다.

허형만 시인의 「처서」 를 읽으며 오래 남는 까닭은 시 한 편의 완성도에만 있지 않다.

날벌레를 낮게 바라볼 줄 아는 눈,

소나무가 구름에 갇히는 장면 앞에서 멈출 줄 아는 마음,

살아갈 날이 짧아졌다는 사실을 과장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

끝내 모든 생명을 흙으로 돌려보내는 낮은 사유.

이 모든 것이 시인의 연륜과 인품을 한 방향으로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가끔 말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세월에게 오래 퇴고된 사람이어야 한다.

젊은 날에는 시인이 시를 고친다.

오래 쓰다 보면 세월이 시인을 고친다.

불필요한 욕심을 지우고

높았던 목소리를 낮추며

자기를 드러내려던 문장을 덜어낸다.

마침내 한 사람 자체가 한 편의 시에 가까워지는 순간이 온다.

허형만 시인의 「처서」 는 그 경지의 한 자락을 보여준다.

날벌레가 낮게 난다.

새들이 푸드덕 날아오른다.

검은 구름이 소나무를 감싼다.

모든 생명은 한철을 지나 흙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 풍경 한가운데 원로시인 한 사람이 서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쓸 것인가를 헤아리기보다

지금까지 무엇을 내려놓으며 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람.

그런 스승에게 문학은 명패가 아니다.

살아온 자세의 뒷모습이다.

허형만의 「처서」를 덮으며 이런 한 문장이 오래 남는다.

큰 시인은 높은 곳에 오래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의 가을이 올수록 더 낮은 곳의 날벌레까지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허형만 시인은 시를 앞세워 사람을 증명하는 시인이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이 먼저 서고 그 뒤를 시가 따라오는 시인이다.□

허형만 시인님께

선생님의 「처서」 를 읽으며 한참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날벌레가 낮게 날고

앞산의 소나무가 검은 구름에 잠기며

새들이 푸드덕 날아오르는 짧은 풍경 속에

한 생의 깊은 저녁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아졌구나”라는 구절 앞에서는

시를 읽는다기보다 한 어른의 삶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젊을 때 높아지는 법을 먼저 배우지만

세월이 깊어질수록 낮아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가지는 일보다 덜어내는 일

더 크게 말하는 일보다 귀 기울이는 일

자신을 드러내는 일보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넓혀주는 일이

삶의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귀해집니다.

선생님의 시에서 느끼는 깊이도 바로 그런 곳에 있습니다.

오랜 세월 한국문학의 중심에서 시를 쓰고 연구하며 후학을 이끌어오셨지만

그 문학적 성취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품입니다.

세상에는 작품이 사람보다 앞서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는 높고 아름다운데 정작 그 시를 쓴 사람의 마음이 그 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반대편에 서 계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인품이 먼저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시가 걸어오는 분.

학문이 사람 위에 서지 않고

문학이 이름을 높이는 도구가 되지 않으며, 사람을 조금 더 낮고 깊게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선생님의 삶과 작품에서 배웁니다.

선생님의 「처서」 마지막에 모든 생명이 흙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구절을 읽으며 문학 또한 결국 흙을 닮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꽃을 피웠다고 자랑하지 않고

열매를 맺었다고 떠들지 않으며

자기 품으로 들어온 모든 것을 다시 다른 생명의 밑거름으로 돌려주는 흙처럼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오랜 세월 후학들에게 보여주신 문학의 자리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앞에 서서 빛을 독차지하기보다

뒤에서 누군가의 문장을 밀어주시고

서툰 시 한 편에도 가능성을 찾아주시며

문학을 배우기 전에 먼저 사람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신 스승.

그런 어른이 문단에 계신다는 것은 후학들에게 큰 복이라 생각합니다.

처서는 여름의 끝이면서 가을의 문입니다.

끝과 시작이 한 절기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 또한 그러합니다.

세월의 유한함을 말하면서 삶을 어둡게 하지 않고

흙으로 돌아감을 말하면서 허무에 머물지 않습니다.

외려 남아 있는 하루를 더 귀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그것이 오래 살아낸 사람의 시가 지닌 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앞으로도 건강하신 모습으로 오래 문단의 큰 나무가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큰 나무는 자신이 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늘이 대신 말하고

그 아래 쉬어간 사람들이 기억합니다.

선생님의 문학 또한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몇 편의 대표작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에 따뜻한 그늘을 내어주었는가로 오래 남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처서」 를 읽고 마음에 한 문장을 새깁니다.

좋은 시는 시인이 먼저 쓴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 살아온 세월이 뒤늦게 문장이 되어 나온 것이라고.

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문학의 깊은 자리에서 오래도록

후학들의 길을 밝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청람 김왕식 올림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