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주광일 시인의 「여름 엽서 51」 을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주광일 시인의 「여름 엽서 51」 을 읽다 2026.08.24
주광일 시인의 「여름 엽서 51」 을 읽다

여름 엽서 51

시인 주광일

햇살 맑은 스기나무숲 길에서 혼자 놀던 까마귀가 울고 납니다. 아무 말도 하기 싫은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멀리멀리 가버립니다.

노시인 한 분, 울컥하는 그리움을 꿀꺽 삼키고, 가던 길 멈춥니다.

2026.8.22

울음이 멀어질수록 그리움은 안으로 깊어진다

― 주광일 시인의 「여름 엽서 51」 을 읽다

주광일 시인의 「여름 엽서 51」 은 아주 짧다.

짧아서 가볍지 않고

짧기 때문에 오래 남는다.

햇살 맑은 스기나무숲 길

혼자 놀던 까마귀 한 마리

그리고 가던 길을 멈춘 노 시인 한 사람.

이 세 존재만으로 시는 충분하다.

많은 시가 감정을 설명하려 하지만

이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까마귀는 울고 날아간다.

노 시인은 울컥한 그리움을 삼킨다.

그 사이에 아무 해설도 없다.

바로 그 침묵이 이 시의 가장 큰 목소리다.

“아무 말도 하기 싫은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멀리멀리 가버립니다.”

이 대목은 단순한 새의 움직임이 아니다.

까마귀는 누구에게 작별을 고하지 않는다.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울음 하나 남기고 사라진다.

떠남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떠나는 쪽보다

남겨진 쪽에서 더 오래 완성되는 것.

까마귀는 이미 숲 너머로 사라졌는데

그 울음은 노시인의 가슴에서 뒤늦게 시작된다.

이 작품에서 까마귀는 한 마리 새이면서 동시에

지나간 사람이고

돌아오지 않는 세월이며

한때 곁에 있었던 모든 존재의 뒷모습이다.

주광일 시인의 시세계에는 이런 특징이 있다.

큰 것을 크게 말하지 않는다.

상실을 말하면서 비명을 지르지 않고

외로움을 말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풍경 하나를 세워두고

독자가 그 풍경 안에서 스스로 마음을 만나게 한다.

그것이 그의 미의식이다.

□ 감정을 토해내기보다 감정이 스스로 익어 떨어지게 기다리는 미학

「여름 엽서 51」 의 중심은 마지막 문장이다.

“노시인 한 분, 울컥하는 그리움을 꿀꺽 삼키고, 가던 길 멈춥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동작이 있다.

삼키는 일

멈추는 일.

울음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대신 안으로 들어간다.

젊은 슬픔은 종종 터져 나온다.

나이 든 슬픔은 삼켜진다.

그것은 감정이 약해져서가 아니다.

외려 너무 많은 이별을 지나왔기 때문에

한 번의 그리움 안에 수많은 이름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노시인의 ‘꿀꺽’은 그래서 단순한 의성어가 아니다.

한 생애가 감정을 삼키는 소리다.

세월 속에서 먼저 떠난 사람들

다시 만나지 못한 얼굴들

미처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인연들

한때는 영원할 줄 알았던 계절들까지

그 한 번의 삼킴 속으로 들어간다.

주광일 시인의 삶의 가치철학도 바로 이 지점에서 읽힌다.

그에게 삶은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붙잡는 일이 아니라

떠나는 것을 끝까지 배웅하는 일에 가깝다.

그는 세상을 오래 살아온 사람답게

삶의 많은 것들이 뜻대로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사람도 떠나고

계절도 떠나며

젊음도 떠난다.

그럼에도 삶을 허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떠났기 때문에 더 귀하고

사라졌기 때문에 더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는 쪽에 가깝다.

이것이 주광일 시인의 문학을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다.

상실은 어둡지만

그가 상실을 바라보는 눈까지 어두운 것은 아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떠난 자리에서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저 멈춘다.

이 ‘멈춤’이 중요하다.

현대인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슬퍼도 지나가고

보고 싶어도 지나가며

사람 하나 떠나도 일정표를 따라 다시 걸어간다.

주광일 시인은 다르다.

까마귀의 울음 하나에도 발을 멈춘다.

그 멈춤은 나약함이 아니다.

존재에 대한 예의다.

작은 생명 하나가 남긴 울음조차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사람의 자세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거창한 선언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가는 새 한 마리 앞에서도

마음을 늦출 줄 아는 데서 드러난다.

그래서 주광일 시인의 시는 법과 정의를 가까이에서 다뤄온 한 사람의 삶과도 묘하게 닿아 있다.

오랫동안 세상의 옳고 그름을 엄정하게 바라본 사람이

노년에 이르러서는 옳고 그름 너머의 연민과 그리움까지 바라본다.

삶의 전반이 저울이었다면

후반은 품이 되어가는 듯하다.

사람을 판단하는 눈에서

사람을 품는 눈으로.

세상을 가르는 언어에서

세상을 껴안는 침묵으로.

그 변화가 그의 시를 더욱 깊게 만든다.

「여름 엽서 51」 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노 시인이 울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울 수 있었지만

그 울음을 과장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감정의 절제가 곧 품격이 된다.

좋은 시는 슬픔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슬픔이 독자 안에서 스스로 커지도록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다.

주광일의 시는 그 빈자리를 잘 만든다.

햇살은 맑고

숲은 푸르며

까마귀는 멀리 날아간다.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은 걷던 길을 멈췄다.

그 짧은 멈춤 속에서

한 생애의 그리움이 일어난다.

이것이 시다.

사건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건 속에 생의 깊이를 발견하는 일.

주광일 시인의 미의식은 그런 절제와 여백에 있다.

말보다 침묵을 믿고

설명보다 장면을 믿으며

큰 울음보다 삼킨 울음을 더 오래 남긴다.

그리고 그의 삶의 철학은 더욱 분명하다.

□ 떠나는 것을 붙잡지 않되

떠난 것이 남긴 울림까지 버리지는 않는 것

그것이 그가 세월을 견디는 방식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고

시를 쓰는 방식일 것이다.

「여름 엽서 51」 은 여름 풍경을 적은 짧은 엽서가 아니다.

한 노 시인이 세월에게 보내는 무언의 답장에 가깝다.

까마귀는 멀리 날아갔다.

노 시인은 그 자리에 멈췄다.

그 순간 멀어진 것은 새 한 마리였지만

가슴 가까이 다가온 것은 오래된 그리움이었다.

하여

이 시를 숙독하고 나면

한 문장이 한참을 떠돈다.

좋은 시인은 떠나는 것을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떠난 뒤에도 그 자리에 남은 울음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주광일 시인은 바로 그런 시인이다.

세월이 깊어질수록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마음을 낮추고

세상을 오래 살아온 만큼 사람을 더 쉽게 판단하지 않으며

작은 생명의 울음 하나에서도 자기 삶의 깊은 그리움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

그의 시가 한참 읽히는 까닭은 문장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니다.

한 생을 품위 있게 살아낸 사람의 침묵이

그 짧은 문장 뒤에서 함께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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