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닳은 것은 구두인가, 한 생의 중심인가 ― 허형만 시인의 <뒷굽> 을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닳은 것은 구두인가, 한 생의 중심인가 ― 허형만 시인의 <뒷굽> 을 읽다 2026.08.24
닳은 것은 구두인가, 한 생의 중심인가 ― 허형만 시인의 <뒷굽> 을 읽다

뒷굽

시인 허형만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 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 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 허형만 시인

시보다 사람이 먼저 닳아야 한다

― 허형만 시인의 <뒷굽> 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형만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기교가 아니다.

사람이다.

그의 시는 시를 잘 쓰는 사람의 문장이라기보다, 오래 사람답게 살아온 이의 말이 어느 날 시가 되어버린 경우에 가깝다.

시보다 인품을 앞에 두고, 수사보다 사람의 온기를 먼저 살핀다. 문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보다 그 문장을 쓰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건너왔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는

기술이 좀처럼 앞에 나서지 않는다.

비유도 뒤에 서고

수사도 뒤에 서며

시인이 먼저 사람의 얼굴로 독자를 맞는다.

<뒷굽> 은 바로

그런 시인 허형만 시학의 한 단면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재부터 대단할 것이 없다.

낡은 구두 한 켤레다.

뒷굽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닳았다.

누구나 한 번쯤 보았을 법한 일상이다.

허형만 시인의 눈에 들어가면 이 사소한 마모가 한 인간의 생애와 사유의 방향을 동시에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여기서 벌써 시는 평범한 구두 수선집을 빠져나온다.

뒷굽 아래에 달 하나가 걸린다.

그것도 보름달이 아니다.

차오르는 달도 아니다.

몸의 대부분을 이미 어둠 쪽에 내주고 마지막 빛만 남긴 그믐달이다.

얼마나

절묘한가.

평생 땅을 밟아온 구두의 가장 낮은 자리에 하늘의 가장 여윈 달을 놓는다.

높음과 낮음이 한 이미지 안에서 만난다.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땅에 닳은 신발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 순간 구두 뒷굽은 단순한 고무가 아니다.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의 반달이 된다.

수선집 주인의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라는 말도 허형만의 귀를 통과하면서 전혀 다른 차원의 문장이 된다.

“참 오래도 사시네요”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한마디가 세 겹으로 변한다.

사물을 두고 한 말이 생애로 건너가고

생애를 두고 한 말이 다시 영혼의 방향을 살피는 말로 깊어진다.

여기에서 시인 허형만 시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는 어려운 철학용어를 불러오지 않는다.

구두 하나를 벗어놓고 철학을 시작한다.

생활을 시 안으로 데려오되 생활을 그대로 적는 데 머물지 않는다.

사소한 것에서 존재의 축을 찾아낸다.

이것을 흔히 생활시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허형만 시인의 생활시는 생활의 표면에 머물지 않는다.

생활 한가운데 작은 구멍을 뚫어 그 아래 숨어 있던 생의 심층까지 내려간다.

그러면서도 어렵게 쓰지 않는다.

이 점이 중요하다.

좋은 시가 반드시 어려워야 한다는 오랜 착각이 있다.

독자가 몇 번을 읽어도 뜻을 알 수 없어야 깊은 시인 것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다.

허형만 시인의 시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읽힌다.

웃긴다.

이해된다.

숙독하고 나면 마음 어딘가가 오래 불편하다.

바로 그 불편함이 시의 질량이다.

쉽게 읽힌다고 가벼운 것이 아니다.

물은 손바닥에 쉽게 잡히지만 바다는 가볍지 않다.

허형만 시인의 시가 그렇다.

문장은 평이한데 그 아래 오래 산 사람의 생각이 가라앉아 있다.

<뒷굽> 에는 특히 풍자와 해학이 절묘하게 섞여 있다.

“좌빨이네요 할까 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 봐 더 겁났다”

잘못 다루면 거칠어질 수 있는 말이다.

시 전체를 정치적 주장으로 끌고 갈 위험도 있다.

허형만 시인은 그 위험한 말을 구두 뒷굽에 신겨놓고 능청스럽게 걸어간다.

웃음이 먼저 난다.

수선집 주인이 닳은 굽을 보고 사람의 사상까지 판별한다는 상상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런데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날카로운 질문 하나가 남는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사람을 한쪽으로 분류하며 살아왔는가.

말 한마디로 좌를 만들고

다른 한마디로 우를 만들며

한 사람의 복잡한 생애를 한 장짜리 표찰에 가두지는 않았는가.

허형만 시인의 풍자는 남을 향한 창끝이 아니다.

자기 발밑을 향한 작은 송곳이다.

그는 세상을 향해 “너희가 기울었다”고 고함치지 않는다.

자기 구두를 벗는다.

자기 뒷굽부터 들여다본다.

바로 이에서 시인의 인품이 문장 앞에 선다.

시 쓰는 사람의 사람됨을 먼저 살핀다는 그의 문학적 태도와 맞닿아 있다.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자기 발자국부터 보는 것.

남의 사상을 재단하기 전에 자기 영혼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살피는 것.

이것은 시의 기법이 아니라 사람의 자세다.

그의 작품에 품격이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풍자가 있지만 조롱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해학이 있지만 가벼운 우스갯소리가 되지 않는다.

정치적 언어가 등장하지만 어느 진영의 깃발도 들지 않는다.

웃음의 숟가락으로 쓴 약을 먹인다.

먹을 때는 웃었는데 목을 넘어간 뒤 조금 쓰다.

좋은 풍자는 대개 그렇다.

웃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웃은 사람의 얼굴을 다시 거울 앞으로 데려간다.

특히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라는 구절은 이 작품 전체의 무게중심이다.

시인은 구두의 편마모에서 영혼의 편마모까지 확장된다.

이 비약이 크지만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사람도 오래 살면 한쪽으로 닳는다.

자기 경험만 오래 믿으면 경험 쪽으로 굳고

지식만 믿으면 지식 쪽으로 기울며

칭찬만 오래 들으면 자기애 쪽으로 무게가 쏠린다.

미움도 오래 품으면 습관이 되고

권력도 오래 쥐면 몸의 중심을 바꿔놓는다.

몸은 똑바로 걷는 것 같지만 마음의 구두를 벗어보면 어느 한쪽이 먼저 닳아 있을 수 있다.

허형만 시인은 바로 그것을 걱정한다.

남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가가 아니라

자기 영혼이 어느 방향으로 쏠리고 있는가.

이런 자기성찰이야말로 허형만 시의 깊은 시심이다.

그의 시심은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숨 쉬고 있다.

수선집 주인의 손에 들려 있고

낡은 뒷굽에 묻어 있으며

구두 바닥의 먼지 속에도 들어 있다.

그의 시는 살아 있다.

책상 위에서 너무 오래 숙성되어 공기가 빠진 시가 아니다.

시장 골목을 지나고

수선집 문턱을 밟고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활의 체온을 그대로 데리고 들어온다.

이것이 시인 허형만 시의 특별한 힘이다.

그는 삶을 철학으로 바꾸기 전에 삶의 냄새를 지우지 않는다.

철학을 말하면서도 구두 냄새가 남아 있고

존재를 말하면서도 수선집 주인의 말투가 살아 있으며

사유를 깊게 끌고 가면서도 독자가 길을 잃게 하지 않는다.

하여,

쉽다. 재미있다.

헌데 아무나 흉내 내기 어렵다.

비슷한 소재를 가져올 수는 있다.

낡은 구두도 쓸 수 있고

좌우를 활용한 농담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시가 되지는 않는다.

왜일까.

시의 표면은 흉내 낼 수 있어도 그 문장 아래 깔린 삶의 질량까지 베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허형만 시인의 쉬움은 단순함이 아니다.

복잡한 것을 통과한 사람이 마지막에 얻은 간결함에 가깝다.

바위가 오랫동안 물에 씻겨 모서리를 잃듯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만나고

많이 견딘 사람이 문장에서 불필요한 힘을 뺀 결과다.

그의 시에는 과시가 적다.

시가 먼저 “나를 보라”고 손을 들지 않는다.

독자 곁에 앉아 있다가 슬쩍 구두를 벗어 보여준다.

“당신 것은 어느 쪽이 닳았습니까”

직접 묻지도 않는다.

독자가 자기 신발을 보게 만든다.

이것이 좋은 시의 힘이다.

가르치지 않고 돌아보게 하는 것.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마음의 기울기를 발견하게 하는 것.

이에 <뒷굽> 은 일종의 영혼의 정형외과다.

겉보기에는 구두를 수선하러 들어갔는데 정작 진찰받는 것은 마음이다.

구두 굽을 갈아달라고 맡겼는데 시인은 자기 생의 중심축까지 엑스레이에 올려놓는다.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이 표현도 허형만 시인답다.

지구는 둥글다.

그런데 시인은 지구에서 모퉁이를 발견한다.

실제로 없는 것을 인간이 만들어낸다.

진영의 모퉁이

자존심의 모퉁이

확신의 모퉁이

이념의 모퉁이.

사람은 둥근 세상을 살면서 자꾸 각을 만든다.

자기가 만든 모서리에 발을 걸치고 평생 한쪽으로 기운다.

이 얼마나 재미있고 무서운 상상인가.

허형만 시인의 시는 바로 이런 데서 깊어진다.

쉽게 웃게 해놓고

웃음 뒤에 존재의 절벽 하나를 세운다.

이 시의 제목이 <구두> 가 아니라 <뒷굽> 이라는 점도 다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앞모습을 관리한다.

구두의 앞코에는 광을 낸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직함을 정리하고

경력을 내세우며

자기 이름을 반듯하게 세운다.

뒷굽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자기 눈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걸어온 삶은 이상하게도 앞코보다 뒷굽에 더 솔직하게 기록된다.

인생도 그렇다.

앞에서는 누구나 좋은 말을 할 수 있다.

사랑을 말하고

정의를 말하고

겸손을 말하며

문학을 말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진짜 뒷굽은 다른 곳에서 드러난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얼마나 견뎠는가.

칭찬받지 못할 때도 같은 태도를 지켰는가.

이익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는가.

허형만 시인이 시 쓰는 사람의 사람됨을 먼저 본다는 사실은 바로 이 지점과 맞닿는다.

시가 아무리 반짝여도 뒷굽이 심하게 기울어 있다면 그는 먼저 그 마모를 바라볼 사람이다.

문학의 광택보다 인간의 보행을 살피는 것이다.

그에게 시는 사람 위에 놓이는 장식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온 자세에서 뒤늦게 돋아나는 한 잎에 가깝다.

허형만 시인의 시에서는 늘 사람이 먼저 온다.

좋은 사람이 좋은 시를 반드시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참 남는 좋은 시에는 대개 그것을 감당할 사람의 깊이가 필요하다.

허형만 시인은 그 깊이를 오랜 세월 자기 삶으로 보여준 시인이다.

<뒷굽> 은 그 사실을 거창한 선언 없이 증명한다.

낡은 구두 하나를 앞에 놓고

웃기고

찔러보고

돌아보게 하고

마지막에는 자기 영혼의 기울기까지 살피게 한다.

이렇게 쉬운 시가 이렇게 깊을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재미있는 시가 이렇게 묵직할 수 있다는 것.

풍자와 해학이 이렇게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곳에 허형만이라는 시인의 독자적인 질량이 있다.

좋은 시인은 어려운 말을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이 매일 밟고 다니면서도 보지 못한 것을 먼저 발견해

그것을 한 사람의 삶으로 바꾸어 보여주는 사람이다.

허형만 시인의 <뒷굽> 이 바로 그렇다.

구두를 수선하러 갔는데

독자는 자기 마음을 들고 수선집에서 나온다.

어디가 닳았는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무엇을 너무 오래 옳다고 믿으며 걸어왔는지.

시 한 편이 사람의 걸음걸이까지 돌아보게 한다.

그것이면 깊은 시는 이미 제 몫을 다한 셈이다.

허형만 시인의 시가 사랑 받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의 시 앞에는 언제나 사람이 서 있다.

시의 기술은 그 사람 뒤에서 말없이 따라온다.

기술을 다 잊고 난 뒤에도 한 가지는 남는다.

시를 잘 쓰는 법보다

사람이 덜 기울어져 사는 법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는 것.

<뒷굽> 은 구두 한 켤레의 마모를 기록한 시가 아니다.

한평생 걸어온 사람이 자기 영혼의 밑창을 뒤집어보는 순간을 기록한 시다.

그 깊은 자기점검을

웃음 한 숟갈과 해학 한 꼬집으로 버무려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내놓는 것.

쉽지만 얕지 않고

재미있지만 가볍지 않으며

낯익지만 아무나 쓸 수 없는 시.

바로 그것이 시인 허형만 시의 힘이고

<뒷굽> 이 보여주는

사람됨에서 출발한 시의 품격이다.

허형만 시인님께

선생님의 <뒷굽> 을 읽고 한참 웃다가,

슬며시

제 신발 밑창부터 뒤집어보았습니다.

시 한 편 읽었을 뿐인데 구두보다 마음이 먼저 들킨 기분이었습니다.

참 재미있고,

참 무섭고,

참 따뜻한 시였습니다.

구두 뒷굽 하나를 가지고 사람의 생애를 말하고, 좌우를 말하고, 영혼의 기울기까지 끌어가는 솜씨가 여간 아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솜씨가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선생님의 시에는 늘 사람이 먼저 있습니다.

시를 어떻게 잘 쓸 것인가보다, 시를 쓰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 오래 생각해오신 분의 문장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면 문학적 기교보다 먼저 사람 냄새가 납니다.

잘 익은 된장처럼 구수하고, 오래 우린 숭늉처럼 속이 편합니다.

첫맛은 쉽고 재미있는데 뒤끝은 오래 남습니다.

<뒷굽> 도 그렇습니다.

“좌빨이네요 할까 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 봐 더 겁났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터집니다.

그런데 웃고 나면 금세 웃음이 목에 걸립니다.

남의 기울기는 그렇게 잘 보면서 정작 제 영혼이 어느 쪽으로 닳고 있는지는 얼마나 자주 살폈던가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풍자는 사람을 베지 않습니다.

살짝 찌릅니다.

피를 내기보다 얼굴을 붉게 만듭니다.

해학도 억지로 웃기지 않습니다.

슬쩍 한마디 던져놓고 독자가 웃음 뒤의 자기 모습을 보게 만듭니다.

그것이 선생님 시의 맛이고, 아무나 흉내 내기 어려운 깊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시를 어렵게 쓰는 일이 깊이라고 오해되는 때가 많습니다.

낯선 말을 겹겹이 쌓아놓고 독자가 길을 잃으면 외려 성공한 시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전혀 다른 길을 갑니다.

읽으면 알겠습니다.

웃음도 납니다.

숙독하고 나면 생각이 한참 남습니다.

쉬운데 얕지 않고, 재미있는데 가볍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술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겠지요.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만으로도 안 될 것입니다.

오래 사람을 만나고, 많이 낮아지고, 자기 마음의 뒷굽을 수없이 갈아본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문장의 무게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늘 시보다 사람을 앞세워 오셨습니다.

시를 쓰는 기술보다 시 쓰는 사람의 사람됨을 먼저 보셨고, 작품의 반짝임보다 그 작품을 떠받치는 인품의 뿌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하여,

선생님의 시에는 살아 있는 체온이 있습니다.

책상 위에서 만든 시가 아니라 골목을 걷고, 사람을 만나고, 구두를 닳게 하며 살아온 세월이 직접 문장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선생님 문학의 가장 큰 품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가 사람보다 앞서 달리지 않는 것.

작품이 이름을 끌고 가지 않고 사람이 작품을 감당하는 것.

문단에서 오래 서 있으면서도 후학의 서툰 문장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

그런 자세야말로 어떤 문학상보다 오래 남는 문인의 훈장일 것입니다.

<뒷굽> 을 읽으며 불현듯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보이지 않는 뒷굽 하나쯤 있을 것이라고.”

한쪽은 자존심 때문에 닳고, 한쪽은 욕심 때문에 기울며, 때로는 오래된 확신 때문에 걷는 자세마저 비뚤어집니다.

그럴 때 누군가는 남의 신발을 검사합니다.

선생님은 자기 신발부터 벗습니다.

바로 그 차이가 시인을 시인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생님.

앞으로도 오래 건강하셔서 계속 이런 시를 써주십시오.

어렵지 않아서 더 어려운 시.

웃기는데 웃고만 있을 수 없는 시.

평범한 사물 하나를 들어 올려 한 사람의 영혼까지 비추는 시.

무엇보다 시보다 사람이 먼저 보이는 시.

그런 작품을 만날 때 후학들은 문학이 아직 사람을 살피는 일임을 다시 믿게 됩니다.

선생님의 <뒷굽> 덕분에 오늘은 구두를 닦기 전에 마음부터 한번 닦아보게 됩니다.

혹시

어느 한쪽이 너무 닳아 있지는 않은지.

혹시

한쪽만 옳다고 믿으며 걷지는 않았는지.

좋은 시 한 편이 독자의 걸음걸이까지 고쳐놓는다면, 그것보다 큰 문학의 역할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님의 시는 구두 굽을 갈아주는 시가 아니라, 사람의 걸음을 다시 반듯하게 세워주는 시입니다.

그 깊고도 맛깔스러운 시심으로 오래도록 문단의 뒷굽이 되어, 우리가 한쪽으로 너무 기울지 않게 붙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청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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