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한 걸음은 몸이 아니라 생애가 내딛는 것이다 ― 김석인 시인의 「한 걸음만 더」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걸음은 몸이 아니라 생애가 내딛는 것이다 ― 김석인 시인의 「한 걸음만 더」 2026.08.26
한 걸음은 몸이 아니라 생애가 내딛는 것이다 ― 김석인 시인의 「한 걸음만 더」

□ 석강 김석인 시인

한 걸음만 더

夕江 김석인

안양천 뚝방길에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벚나무 잎은 무성해지고

그늘은 한층 깊어져

걷기에 참 좋은 길이다

아이를 태운 유모차도 지나가고

털북숭이 강아지도 신이 나서 걷는데

저기

할머니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사람이 있다

한 걸음만 더

한 발만 더 앞으로

넘어질세라

뒤에서 허리를 받쳐주며

조심조심 걷는 연습을 한다

저 어르신도

왕년에는 산업전선에서

젊은 날의 땀을 쏟았을 것이고

승용차 핸들을 잡고

세상 곳곳을 누비기도 했을 터인데

세월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두 다리의 힘마저 가져가 버렸다

바라보는 자식의 마음도

걷는 어르신의 마음도

얼마나 아플까

그래도 오늘은

한 걸음만 더

내일은

한 발만 더

삶이란 어쩌면

그렇게 마지막까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걸음은 몸이 아니라 생애가 내딛는 것이다

― 김석인 시인의 「한 걸음만 더」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람의 생애는

대개 발에서 시작해

발에서 저문다.

어린아이는 첫걸음을 떼는 순간 세상으로 들어가고, 노인은 마지막까지 한 발을 옮기며 세상과의 인연을 붙든다. 삶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수많은 길이 놓여 있지만, 인간에게 남는 것은 얼마나 멀리 갔느냐가 아니라 끝까지 제 발로 한 걸음을 내디뎠느냐는 물음인지도 모른다.

김석인 시인의 「한 걸음만 더」 는 바로 그 한 걸음의 무게를 바라보는 시다.

안양천 뚝방길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다. 벚나무 잎이 우거지고, 유모차가 지나가고, 털북숭이 강아지가 사람보다 먼저 계절을 즐기는 생활의 길이다. 김석인 시인은 그 익숙한 풍경 한가운데 한 노인의 느린 걸음을 세워놓는다.

여기에서

풍경의 시간이 갑자기 달라진다.

유모차는 생의 시작을 싣고 지나가고, 노인은 생의 저녁을 두 발에 매달고 걷는다. 한쪽에는 아직 걷지 못하는 아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다시 걷는 법을 배워야 하는 노인이 있다. 이 대조는 우연한 배치가 아니다. 한 장면 안에서 탄생과 노년이 서로의 얼굴을 비춘다.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둥근 길이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걷고, 마지막에도 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걷는다. 인간은 독립을 배워가며 성장하지만, 의지하는 법을 다시 배우며 늙어간다. 그 사이를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른다.

“한 걸음만 더

한 발만 더 앞으로”

이 짧은 반복은 이 시의 중심 박동이다.

말만 놓고 보면 재활치료실에서 들을 법한 격려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 속으로 들어오면 의미가 달라진다. 여기서 한 걸음은 거리의 단위가 아니다. 존재의 단위다.

젊은 날에는 백 리를 가는 것보다 한 리를 더 가는 일이 중요했다. 경쟁하고, 앞서고, 성취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삶의 문법이었다. 노년에 이르면 문법이 바뀐다.

한 발을 떼는 일이 성취가 되고

몸을 일으키는 일이 용기가 되며

넘어지지 않는 하루가 하나의 승리가 된다.

젊음이 속도를 숭배한다면 노년은 균형을 배운다.

그 점에서 「한 걸음만 더」 는 단순한 노년의 애상시가 아니다. 인간 존재의 가치가 능력과 속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낮은 목소리로 일깨우는 시다.

“저 어르신도

왕년에는 산업전선에서

젊은 날의 땀을 쏟았을 것이고”

이 대목에서 김석인 시인은 노인의 현재만 바라보지 않는다. 현재의 굽은 허리 뒤에 한때의 청춘을 세워놓는다.

노인의 느린 발에는 젊은 날의 속도가 접혀 있다.

공장의 기계음이 있었을 수도 있고, 출근길의 새벽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쉬지 못했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승용차 핸들을 잡고 먼 도시를 오갔던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한 발조차 힘겨운 몸 안에 한때 세상을 빠르게 건너던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김석인 시인은 잊지 않는다.

이 시선이 중요하다.

노인을 현재의 쇠약함만으로 읽는 것은 인간을 한 장면으로 축소하는 일이다. 사람은 현재의 모습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의 몸에는 지나온 계절이 겹겹이 쌓여 있다.

주름은 피부의 금이 아니라 세월이 써놓은 필사본이고

굽은 허리는 패배의 모양이 아니라 한 생애가 짊어졌던 무게의 흔적이다.

김석인 시인의 시는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이력을 읽어낸다.

“세월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두 다리의 힘마저 가져가 버렸다”

이 표현에는 세월에 대한 서늘한 의인화가 있다.

세월은 여기에서 단순히 흐르는 시간이 아니다. 사람에게서 하나씩 가져가는 존재다. 검은 머리를 가져가고, 눈의 초점을 가져가고, 귀의 밝음을 가져가고, 마침내 다리의 힘까지 가져간다.

젊을 때 사람은 시간을 쓴다고 말하지만

노년에 이르면 시간이 사람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역설이 작품의 깊이를 만든다.

인간은 평생 시간을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시간도 인간의 몸을 조금씩 소비한다. 그러므로 노년의 몸은 낡은 몸이 아니라 시간과 오래 맞서온 몸이다.

그 몸을 바라보는 김석인 시인의 시선에는 연민이 있지만 동정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동정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감정이지만, 연민은 같은 높이에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마음이다.

김석인 시인은 노인을 가엾은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외려 한 발을 떼는 노인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마지막 존엄을 드러낸다.

걷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육체의 서명이다.

발이 땅을 딛는 순간 인간은 아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걸음만 더”는 단순한 운동의 명령이 아니라 삶과 세계 사이의 끈을 조금 더 이어가자는 말이다.

뒤에서 허리를 받쳐주는 손 또한 이 시에서 매우 중요한 이미지다.

한 사람의 생애가 무너질 때 인간을 붙드는 것은 거대한 제도가 아니라 결국 누군가의 손이다.

부모가 어린 자식의 겨드랑이를 받쳐 첫걸음을 돕던 시간이 거꾸로 돌아와, 이제 자식이 늙은 부모의 허리를 받친다.

시간은 여기서 하나의 원을 그린다.

예전에 받은 손길을 다시 돌려주는 것

돌봄이 세대를 건너 되돌아오는 것

그것이 가족이라는 오래된 순환이다.

이 장면에는 효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효가 있고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사랑이 있다.

좋은 시는 추상명사를 크게 외치지 않는다. 손 하나를 보여주고 그 안에서 사랑을 읽게 한다.

김석인 시인의 신앙적 성정 또한 이 작품의 밑바닥에서 은은하게 작용한다.

독실한 신앙인인 김석인 시인에게 인간은 능력의 크기로 평가되는 존재가 아니다. 걸을 수 있을 때만 존귀한 것도 아니고, 생산할 수 있을 때만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

약한 몸에도 존엄이 있고

의지하는 순간에도 품격이 있으며

쓰러질 듯한 사람에게는 더 깊이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인간관이 작품 전체에 배어 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을 종교적 언어로 설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신앙은 이 시에서 교리가 아니라 태도로 나타난다.

기다려주는 마음

부축하는 손

넘어질까 염려하는 눈빛

한 걸음을 함께 견디는 인내

그 모든 것이 이미 신앙의 실천적 은유다.

말로 하늘을 높이는 것보다 한 사람의 허리를 받치는 일이 더 깊은 기도일 때가 있다.

이 시는 그 사실을 말없이 보여준다.

또한 김석인 시인의 인품은 작품의 어조에서 드러난다.

그의 문장은 사람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수사적 재료로 과장하지도 않는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되 마음은 가까이 다가간다.

그 거리감이 품위다.

문학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타인의 아픔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소비하는 일이다. 김석인 시인의 시는 그 유혹을 피한다. 노인의 걸음을 비장하게 만들지도 않고, 지나친 감상으로 끌고 가지도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바라본다.

점잖고 단정한 김석인 시인의 인품이 시의 문장에도 그대로 내려앉아 있다.

모든 문인에게 존경받는 원로 시인으로서의 무게 역시 이런 데서 확인된다. 문학적 연륜이란 어려운 말을 많이 쓰는 능력이 아니다.

남의 아픔 앞에서 말의 목소리를 낮출 줄 아는 것

삶보다 문장이 앞서지 않게 하는 것

한 사람의 작은 몸짓을 오래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짜 연륜이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면 “한 걸음”은 더 이상 노인의 걸음만이 아니다.

삶 자체가 한 걸음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보이지 않는 재활치료실을 지나며 산다.

상처를 입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관계가 무너진 뒤 다시 손을 내미는 사람도 있으며

실패 후 다시 출근하는 사람도 있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뒤 다시 밥을 짓는 사람도 있다.

그 모든 것이 한 걸음이다.

삶은 때로 달리는 사람보다 다시 걷기 시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용기를 요구한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넘어진 뒤 다시 발바닥을 땅에 대는 사람이 강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 걸음만 더」는 노년의 시를 넘어 인간 회복의 시다.

유모차에서 시작된 생은 언젠가 부축을 받는 몸으로 돌아간다. 그 사이 우리는 수많은 길을 걷는다.

많이 가는 것도 중요하고

높이 오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어쩌면 다른 질문이다.

누군가 힘들게 한 발을 떼고 있을 때

그 허리를 받쳐준 적이 있는가.

김석인 시인의 시가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울림은 바로 거기에 있다.

걷는 사람보다

받쳐주는 손이 더 오래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인간의 품격은 대개 그런 순간에 드러난다.

「한 걸음만 더」 는 작은 걸음을 통해 큰 생애를 읽어낸다.

한 발은 짧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청춘과 노동과 가족과 늙음이 함께 들어 있다.

발 하나를 옮기는 동안

인생 전체가 앞으로 움직인다.

김석인 시인에게 ‘한 걸음’은 그래서 가장 작은 말이면서 가장 큰 은유다.

삶은 멀리 가는 기술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한 발을 놓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김석인 시인의 시는

그 한 걸음 곁에 서서

말보다 먼저 손을 내민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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