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를 접을 줄 아는 사람의 시 ― 시인 이영하 시의 비행미학과 귀환의 존재론
날개를 접을 줄 아는 사람의 시 ― 시인 이영하 시의 비행미학과 귀환의 존재론 2026.09.02
□ 이영하 시인
■
쉼과 여유
하늘시인 이영하
나는 너무 오래 앞만 보고 걸었다.
뒤에서 부르는 바람도
곁에 피는 꽃도 몇 번이나 지나쳤다.
하늘을 날 때에는
목적지의 좌표가 필요했지만
땅에 내려온 뒤에는
잠시 멈출 자리가 필요했다.
경안천 물소리에 걸음을 늦추고
갈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바라보며
비로소 알았다.
인생은
채우는 일만으로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빈 찻잔 하나에도
오래 머무는 향기가 있고
말을 아낀 하루에도
사람의 마음은 자란다.
이제는 조금 천천히 가려 한다.
늦게 피는 해도 바라보고
먼 사람의 안부도 기다리면서
남은 날의 가장 좋은 속도는
서두르지 않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 이영하 전 공군참모차장

■
날개를 접을 줄 아는 사람의 시
― 이영하 시의 비행미학과 귀환의 존재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Ⅰ. 들어가는 말
― 하늘을 오래 날아본 사람은 왜 다시 땅을 바라보는가
사람은 대개 높이 오르는 법부터 배운다.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상승을 권한다. 속도는 능력이 되고, 높이는 성취가 되며, 멈춤은 때때로 패배처럼 읽힌다.
그런데 평생 실제 하늘을 날아온 한 시인이 삶의 후반부에 이르러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이영하 시인이다.
그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전투조종사로 복무했고, 33년 동안 2,300시간이 넘는 비행을 수행했다. 공군남부전투사령관, 공군교육사령관 등을 거쳐 공군참모차장을 지냈으며 2007년 군 생활을 마쳤다.
이후 주레바논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했고, 여러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사회공헌 활동에도 참여해왔다.
그의 생애를 단순히 이력으로만 읽으면 ‘상승’의 삶이다.
전투조종사에서 지휘관으로,
군인에서 외교관으로,
외교관에서 교육자로,
다시 시인으로.
그런데 그의 시를 따라가면 이상한 역전이 일어난다.
삶의 후반으로 갈수록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다.
외려 낮은 곳을 바라본다.
빠른 속도를 숭배하지 않는다.
천천히 걷는 일을 말한다.
날개를 계속 펼치지 않는다.
마침내 날개를 접을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이영하 시의 가장 중요한 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의 시는 비상의 시이면서 동시에 귀환의 시다.
날아오르는 법을 말하면서도 결국 착륙을 이야기하고,
하늘을 사랑하면서도 끝내 땅으로 돌아오며,
속도의 삶을 통과한 뒤 여유의 미학에 이른다.
그의 최근 시집 『하늘에 닿은 날갯짓』 역시 전투조종사로서의 비행 체험과 삶의 성찰을 결합하고 있으며, 특히 「활주로와 인생」 같은 작품에서는 이륙과 착륙을 인생의 도약과 정착의 은유로 확장한다.
이영하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날개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 날개가 어디로 돌아오는가를 보는 것이다.
Ⅱ. 전투조종사의 눈
― 좌표와 속도가 생명을 결정하던 시간
비행기의 조종석은 인간에게 허세를 허락하지 않는다.
하늘에서는 작은 착오가 큰 결과를 만든다.
고도
속도
방향
기상
연료
거리
조종사는 끊임없이 수치를 확인해야 한다.
지상에서는 잠시 길을 잘못 들어도 차를 돌리면 된다.
하늘에서는 판단 하나가 생명과 연결된다.
그런 공간에서 2,300시간 이상을 보냈다는 사실은 이영하 시인의 시적 감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에게 ‘방향’은 관념이 아니었다.
‘좌표’도 수사가 아니었다.
‘하늘’ 역시 낭만적 배경에 머물지 않았다.
실제 삶의 현장이었다.
이 때문에 「쉼과 여유」의 다음 대목은 그의 생애와 맞닿으며 특별한 의미를 얻는다.
“하늘을 날 때에는
목적지의 좌표가 필요했지만
땅에 내려온 뒤에는
잠시 멈출 자리가 필요했다.”
여기에는 한 인간의 생애가 두 단어로 압축되어 있다.
좌표와 자리
좌표는 찾아가야 할 곳이다.
자리는 머물러도 되는 곳이다.
좌표는 미래를 향한다.
자리는 현재를 받아들인다.
좌표는 사람을 계속 움직이게 하고,
자리는 사람에게 잠시 멈출 권리를 준다.
젊은 이영하에게 인생은 좌표의 문제였을 것이다.
정확하게 가야 했다.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위치에,
정해진 방향으로 도달해야 했다.
군인의 시간은 본질적으로 정확성의 시간이다.
그런데 삶의 후반부에 시인은 전혀 다른 시간을 발견한다.
목적지가 없는 시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꽃 한 송이를 바라보느라 늦어도 되는 시간.
한 사람의 안부를 천천히 기다려도 되는 시간.
그것이 ‘쉼’이다.
따라서 이영하 시의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정확성의 세계를 오래 살아온 사람이 불확정성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변화다.
통제에서 수용으로.
속도에서 기다림으로.
도착에서 머무름으로.
삶의 문법 전체가 바뀐다.
Ⅲ. 하늘이라는 원형 이미지
― 비행의 공간에서 존재의 공간으로
이영하 시세계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미지는 ‘하늘’이다.
『하늘에 닿은 날갯짓』 의 목차만 보아도 「하늘은 내 고향」, 「하늘에 그려보는 낙서」, 「야간 비행」, 「구름 위의 정거장」, 「하늘과 바람의 대화」, 「하늘과 맞닿은 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 하늘과 비행의 이미지가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하늘은 임무의 공간이었다.
국가의 영공을 지켜야 했고,
조종사가 긴장해야 했으며,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해야 했다.
시인이 된 뒤의 하늘은 달라진다.
하늘은 기억의 장소가 된다.
고향이 되고,
자유가 되고,
삶 전체를 내려다보게 하는 철학적 공간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중요하다.
같은 하늘이지만 보는 사람이 달라졌다.
한때의 하늘에서는 계기판을 보아야 했다.
이제의 하늘에서는 구름을 본다.
예전에는 바람을 계산해야 했다.
이제는 바람과 대화를 나눈다.
예전에는 활주로를 찾아야 했다.
이제는 노을을 바라본다.
이것은 직업적 체험이 시적 상상력으로 승화되는 과정이다.
좋은 시인은 자신의 과거를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
삶을 새로운 의미로 변환한다.
이영하에게 비행은 더 이상 군사적 경험만이 아니다.
인간 존재의 은유가 된다.
이륙은 출발이다.
비상은 꿈이다.
난기류는 시련이다.
항로는 선택이다.
착륙은 귀환이다.
이 모든 비유가 억지스럽지 않은 까닭은 그의 생애에서 실제로 길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삶을 통과한 비유는 언어의 장식이 아니다.
체온을 가진다.
Ⅳ. 날개의 역설
― 가장 높은 날개가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보기까지
이영하 시세계에서 ‘날개’는 하늘과 함께 반복되는 또 하나의 원형 이미지다.
그의 저작에는 『늘어나는 날개』 라는 전자시집이 있고, 『하늘에 닿은 날갯짓』 이 있으며, 최근에는 『영혼의 날개로』 라는 시집이 이어졌다.
이 제목들의 연쇄는 흥미롭다.
처음에는 날개 자체가 중요하다.
그다음에는 그 날개가 하늘에 닿는다.
마침내 날개는 육체의 날개에서 ‘영혼의 날개’로 변한다.
비행의 방향이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하는 것이다.
『영혼의 날개로』 를 소개하는 글에서도 그의 최근 시세계는 도약의 서사보다 귀환의 서사, 삶의 고도보다 사람 곁으로 돌아오는 태도, 사랑 · 책임 · 절제 · 관용에 대한 사유가 두드러진다고 평가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다.
젊음의 날개는 높이를 욕망한다.
노년의 날개는 방향을 묻는다.
더 높이 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날개를 갖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날개를 접는 것이다.
사람은 한번 높은 곳에 익숙해지면 쉽게 내려오지 못한다.
직위가 높아질수록 직함을 내려놓기 어렵고,
명성이 커질수록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군인의 계급장도 그렇다.
외교관의 직함도 그렇다.
사람은 때때로 자기가 맡았던 역할과 자기 자신을 혼동한다.
이영하 시의 후기적 성숙은 바로 그 역할의 옷을 벗는 데 있다.
공군 장성이었던 사람.
대사였던 사람.
교수였던 사람.
이 모든 이름을 하나씩 내려놓고,
경안천 물가에서 갈대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계급장이 없다.
바람은 장군에게 더 공손하게 불지 않는다.
물은 대사에게 먼저 길을 내주지 않는다.
갈대는 명함을 읽지 않는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다시 한 사람이다.
이 귀환이 이영하 시의 중요한 존재론적 사건이다.
Ⅴ. 「쉼과 여유」
― 삶의 과속에서 내려오는 정신적 착륙
「쉼과 여유」 는 이영하 후기시의 철학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준다.
첫 구절은 자전적이다.
“나는 너무 오래 앞만 보고 걸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래’와 ‘앞’이다.
‘앞’은 목표의 방향이다.
사람은 목표가 있을 때 앞을 본다.
반면, 꽃은 옆에 있다.
바람은 뒤에서도 온다.
즉 앞만 본다는 것은 목표를 얻는 대신 세계의 다른 방향을 잃었다는 뜻이다.
시인은 말한다.
“뒤에서 부르는 바람도
곁에 피는 꽃도 몇 번이나 지나쳤다.”
이 대목은 이 작품의 중요한 자기반성이다.
사람은 대부분 큰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삶에서 더 자주 잃는 것은 작은 것들이다.
저녁노을 한 번.
가족과의 식사 한 끼.
오래된 친구의 안부.
길가의 풀꽃.
바람의 냄새.
사람은 목적을 이루느라 이런 작은 것들을 얼마나 많이 놓치는가.
이영하의 삶에는 성취가 많았다.
군인으로서 긴 시간 국가에 봉사했고,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교육자로 후학을 만났고,
이후 문학과 사회공헌 활동을 계속해왔다.
바로 그런 사람이 “지나쳤다”고 말한다.
이 고백 때문에 시가 깊어진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여유를 말하는 것과,
많은 것을 이루어본 사람이 비움의 필요를 말하는 것은 다르다.
이영하의 여유에는 통과의 시간이 있다.
채워본 사람이 비움을 말하고,
날아본 사람이 착륙을 말하며,
빨리 가본 사람이 천천히 걷는 법을 말한다.
Ⅵ. 경안천의 물
― 직선의 인생이 곡선을 배우는 순간
「쉼과 여유」 에서 경안천은 매우 중요한 장소다.
“경안천 물소리에 걸음을 늦추고
갈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바라보며”
시인은 물 앞에서 걸음을 늦춘다.
물은 이영하의 전반기 삶과 정반대되는 존재다.
비행에는 항로가 있다.
강물에는 굽이가 있다.
비행기는 최단거리와 효율을 생각하지만,
강은 돌을 만나면 돌아간다.
그럼에도 결국 바다로 간다.
이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돌아가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한다.
물은 그렇지 않다.
굽어가는 것도 흐름이다.
잠시 머무는 것도 흐름이다.
돌을 피하는 것도 후퇴가 아니다.
물은 세계와 싸우지 않고 자기 길을 만든다.
평생 정확성과 결단의 시간을 살아온 시인에게 경안천은 전혀 다른 철학을 가르치는 스승이 된다.
인생에는 직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늦어져도 된다는 것.
돌아가도 된다는 것.
때로는 멈추어도 삶의 방향을 잃지 않는다는 것.
이영하 시인의 노년적 사유는 자연 앞에서 더욱 부드러워진다.
군인의 세계에서는 명령이 중요했다.
자연에서는 순응이 중요하다.
비행에서는 바람을 계산해야 한다.
갈대는 바람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저 몸을 눕힌다.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선다.
갈대는 시인에게 굴복과 유연함이 다르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휘어진다고 패배한 것은 아니다.
잠시 숙인다고 존재를 잃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강한 사람의 마지막 공부는 버티는 법이 아니라 휘어질 줄 아는 법인지도 모른다.
Ⅶ. 빈 찻잔의 철학
― 무엇을 채웠는가에서 무엇이 남았는가로
「쉼과 여유」 에서 가장 사유 깊은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빈 찻잔이다.
“빈 찻잔 하나에도
오래 머무는 향기가 있고”
잔이 비었다.
일반적으로 비어 있다는 것은 부족함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정반대다.
비워진 뒤에 향기가 드러난다.
이것은 한 인간의 후반생을 상징하는 매우 아름다운 은유다.
사람은 젊을 때 자신을 채운다.
학력을 채운다.
경력을 채운다.
직위를 채운다.
재산을 채우고,
사람을 만나고,
명함에 여러 글자를 보탠다.
이영하의 삶에도 수많은 이름이 있었다.
전투조종사.
장군.
외교관.
교수.
사회공헌 활동가.
시인.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내려놓는다.
계급장도 내려놓는다.
공직도 끝난다.
명함도 바뀐다.
마침내 인간에게 남는 질문은 하나다.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다.
무엇이 남았는가.
빈 찻잔에 남는 것은 차가 아니다.
향이다.
사람도 그렇다.
직위를 내려놓은 뒤에도 존중받는가.
성과가 지나간 뒤에도 따뜻함이 남는가.
떠난 뒤에도 사람들이 그 사람을 생각하며 마음이 편안해지는가.
그것이 삶의 향기일 것이다.
이영하 시인이 말하는 쉼의 철학은 그래서 비움의 철학과 연결된다.
비움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Ⅷ. 외교관의 시간과 ‘먼 사람의 안부’
― 국경을 넘은 사람이 관계의 거리를 생각하다
이영하 시인은 군 생활 이후 주레바논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했다. 그의 시집 『하늘에 닿은 날갯짓』 에도 「중동의 보석 레바논」, 「동명부대와 티르」, 「백향목의 고장 브샤레」, 「레바논의 하늘 아래서」, 「칼릴 지브란의 생가에 서서」, 「베이루트를 그리워하며」 등 외교관 시절과 해외 체험을 환기하는 작품들이 다수 실려 있다.
이 점에서 「쉼과 여유」 의
“먼 사람의 안부도 기다리면서”
라는 구절도 새롭게 읽힌다.
‘먼 사람’은 단순한 거리의 사람이 아닐 수 있다.
한때 국경을 넘어 사람을 만나고,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와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대화해야 했던 사람에게 거리는 단순히 킬로미터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다.
외교는 본질적으로 기다림의 기술이기도 하다.
자기 뜻만 말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합의에는 시간이 걸린다.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군인이 결단의 세계를 살아간다면 외교관은 조율의 세계를 살아간다.
이 두 경험이 이영하의 시 안에서 흥미롭게 만난다.
결단과 기다림.
속도와 조율.
명령과 대화.
이 서로 다른 세계를 모두 살아본 사람이 노년에 ‘여유’를 말한다.
그 여유에는 단순한 한가함 이상의 깊이가 있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인정해주는 태도다.
안부가 늦게 와도 기다리는 것.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 것.
상대가 자기 속도로 걸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남겨두는 것.
그것이 관계의 여유다.
Ⅸ. 교육자와 사회공헌의 삶
― 앞에서 이끌던 사람이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으로
이영하는 군과 외교 현장을 떠난 뒤 여러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사회공헌 활동에도 참여해왔다. 특히 다사랑월드 활동에서는 청소년 가장과 취약계층 청소년을 지원하는 장학·교육·사회공헌 사업에 관심을 보여왔다.
이러한 삶은 그의 후기시에서 나타나는 ‘낮은 곳’의 감각과 무관하지 않다.
젊은 군 지휘관의 역할은 사람을 앞에서 이끄는 것이었다.
좋은 교육자의 역할은 조금 다르다.
학생이 자기 길을 찾아가도록 기다려야 한다.
사회공헌 역시 비슷하다.
자기 성취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다시 설 수 있도록 받쳐주는 일이다.
여기에 이영하 삶의 중요한 방향 전환이 있다.
앞에서 가는 사람에서,
곁에 있는 사람으로.
명령하는 사람에서,
기다려주는 사람으로.
이것은 노년의 약화가 아니다.
인격의 확장이다.
사람의 힘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자기를 세우는 힘과,
타인을 세우는 힘.
젊은 날에는 전자가 중요하다.
생의 깊이가 더해지면 후자가 더 귀해진다.
이영하의 시가 최근 사랑 · 책임 · 회복 · 관용과 같은 주제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생애적 전환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다. 『영혼의 날개로』 역시 이러한 후기적 사유를 중심에 두고 있다.
Ⅹ. 말의 절제
― 조종석의 정확성이 시의 간결함으로 이동하다
이영하 시의 언어는 대체로 어렵지 않다.
복잡한 관념적 수사를 쌓기보다 삶의 경험에서 직접 길어낸 이미지와 평이한 언어를 사용한다.
하늘
날개
바람
활주로
구름
갈대
찻잔
노을
이런 익숙한 사물들이 그의 시에서 반복된다.
일부 독자에게는 너무 평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의 시를 생애와 연결해서 읽으면 이 평이함의 다른 의미가 보인다.
전투조종사의 언어에는 모호함이 위험하다.
명령은 정확해야 한다.
보고는 간결해야 한다.
좌표는 분명해야 한다.
이러한 직업적 언어 감각이 시에서도 일정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영하 시의 장점은 어려운 말을 통해 깊어지려 하지 않는 데 있다.
인생의 경험 자체를 믿는다.
다만 앞으로 그의 시가 한 단계 더 깊어질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설명을 조금 더 덜어내고,
사물의 이미지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기다리는 것.
예컨대
“빈 찻잔 하나에도
오래 머무는 향기가 있고”
와 같은 구절은 설명보다 이미지가 앞서기 때문에 오래 남는다.
이런 순간에 이영하의 시는 가장 빛난다.
좋은 노년시는 교훈을 말하지 않는다.
교훈이 사물 속에서 저절로 배어나오게 한다.
잘 익은 과일은 자신이 달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향으로 알린다.
이영하 시가 앞으로 더욱 높은 미학적 밀도에 도달하려면 그가 평생 배운 삶의 철학을 설명하기보다 한 장면과 한 이미지 안에 더 깊이 숨겨둘 필요가 있다.
그럴 때 그의 삶 자체가 시어가 된다.
XI. ‘쉼’은 은퇴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비행이다
― 속도의 해체와 존재의 귀환
「쉼과 여유」 를 읽으며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을 단순한 노년의 안분지족으로 읽는 것이다.
시인은 세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는 조금 천천히 가려 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차이다.
멈추겠다는 것이 아니다.
속도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삶의 동력은 그대로 있다.
다만 엔진의 회전수를 낮춘다.
목적지보다 풍경을 보고,
성과보다 관계를 살피며,
빠르게 말하기보다 기다리는 법을 택한다.
이것은 ‘제2의 비행’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비행은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비행은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첫 번째 비행에는 날개가 필요했다.
두 번째 비행에는 여유가 필요하다.
첫 번째 비행에는 좌표가 필요했다.
두 번째 비행에는 방향만 있으면 된다.
첫 번째 비행에서 안전한 착륙이 중요했다면,
두 번째 비행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이 이영하 시의 귀환의 존재론이다.
XII. 날개에서 사람으로
― 이영하 시세계의 궁극적 방향
이영하의 시적 변화를 크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방향이 보인다.
하늘에서 땅으로.
비상에서 귀환으로.
속도에서 방향으로.
좌표에서 자리로.
성취에서 관계로.
충만에서 비움으로.
말에서 침묵으로.
날개에서 사람으로.
이 흐름은 단순히 노년의 변화가 아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긴 생애를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젊은 날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비행이 있었기에 착륙의 의미가 생긴다.
속도를 알았기에 느림의 가치를 안다.
높이 올라가보았기에 낮은 곳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영하 시의 강점은 바로 이 ‘통과의 언어’에 있다.
그는 삶을 관념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다.
직접 지나왔다.
하늘을 실제로 날았다.
국가의 책임을 짊어졌다.
낯선 나라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했다.
후학을 가르쳤다.
사회공헌의 현장에도 참여했다.
그 긴 시간을 지나 이제 갈대를 바라본다.
그렇기에 갈대 한 포기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생애 끝에 만난 스승이다.
XIII. 결론
― 가장 좋은 날개는 돌아올 줄 아는 날개다
한 장면을 그려본다.
젊은 이영하가 전투기 조종석에 앉아 있다.
계기판에는 수많은 숫자가 켜져 있다.
고도를 본다.
속도를 본다.
방향을 확인한다.
무전기가 울린다.
손은 조종간을 잡고 있다.
눈은 전방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수천 시간을 날았다.
세월이 흐른다.
조종석에서 내려온다.
계급장을 내려 놓는다.
장성의 직책도 지나간다.
레바논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외교관의 시간도 흘러간다.
강의실의 시간도 지나간다.
어느 날 경안천 물가에 선다.
앞에는 계기판이 없다.
속도계도 없다.
고도계도 없다.
갈대 몇 포기가 바람에 몸을 눕히고 있다.
물이 흐른다.
노을이 늦게 내려온다.
빈 찻잔에는 차가 없지만 향기가 남아 있다.
평생 하늘의 좌표를 읽었던 사람이
비로소 자기 마음의 좌표를 읽는다.
그때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지는 멀리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평생 돌아가고 싶었던 곳이 결국 자기 마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영하 시의 진정한 착륙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시에서 날개는 처음에는 높이 오르는 힘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날개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되었다.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람 곁으로 내려오는 힘이 된다.
이것이 중요하다.
세상에는 날개를 가진 사람이 많다.
그 날개로 높은 곳에 올라가는 사람도 많다.
끝내 내려올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높은 자리를 내려놓고,
빠른 속도를 낮추고,
자기보다 작은 것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
그것이 한 인간의 성숙일 것이다.
이영하 시인의 「쉼과 여유」 는 바로 그 성숙의 문턱에 놓인 작품이다.
쉼은 피로한 사람이 누워 있는 시간이 아니다.
너무 빠르게 살아온 사람이 자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여유는 시간이 남는 상태가 아니다.
한 송이 꽃 때문에 조금 늦어져도 불안하지 않은 마음이다.
착륙은 비행의 끝이 아니다.
사람에게 돌아오는 일이다.
그래서 이영하 시인의 삶을 관통하는 ‘날개’를 다시 정의하고 싶다.
좋은 날개는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가로 평가되지 않는다.
어디로 돌아왔는가로 평가된다.
조국을 지키던 하늘에서,
세계와 만나던 외교의 하늘에서,
마침내 사람 곁으로 돌아온 날개.
그 날개가 이제 경안천 갈대 위에서 천천히 접히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날개를 접었는데,
그때부터 더 먼 곳이 보인다.
하늘에서는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이고,
속도 속에서는 들리지 않던 물소리가 들리며,
직함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사람의 안부가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삶의 마지막 비행일 것이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비행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가장 낮고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비행.
이영하 시인은 이제 그 항로를 날고 있다.
그의 가장 높은 고도는
하늘 위 몇 만 피트가 아니라,
작은 풀꽃 하나 앞에서 자신의 걸음을 늦출 수 있는 마음의 높이일지도 모른다.
하늘을 다 날아본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공부는
더 높이 오르는 법이 아니다.
바람 한 줄기를 놓치지 않는 법,
사람 하나의 안부를 기다리는 법,
빈 찻잔의 남은 향기를 알아보는 법,
그리고
날개를 접고도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이다.
이영하 시의 미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더 깊어질 것이다.
비상보다 귀환이 깊고,
속도보다 방향이 오래가며,
높이보다 사람이 마지막에 남는다.
그것이 하늘시인 이영하가 긴 비행 끝에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항로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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